강제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막 박사과정을 마친 이창환의 가슴을 뛰게 했다. 막대한 제작비를 들이며 본격적으로 컴퓨터그래픽(CG)을 영화 제작에 활용한 이 영화는 한국영화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서울대 전기공학부 동기이자 박사과정을 함께했던 친구 최광진과 함께 CG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를 차리기로 맘먹었다. 그러고는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님, 저희가 끝내주는 CG 기술을 만들려고 합니다. 회사도 차리고요. 그런데 돈이 없어요. 창고 좀 쓸 수 없을까요?”
두 사람은 망가진 의자와 책상, 각종 기자재를 쌓아놓았던 먼지 쌓인 창고를 공짜로 얻었다. 깨끗하게 쓸고 닦고 기자재도 잘 관리하는 조건이었다. 회사 이름도 정했다. 특수효과(effects·FX)를 뜻하는 FX와 기계를 의미하는 기어(gear)를 합친 ‘에프엑스기어’. 특수효과를 만드는 소프트웨어 개발사라는 뜻이었다. 대표는 이창환이 맡았고, 최광진은 기술을 책임졌다.
○ 2006년, 괴물(제작비 140억 원)
2년 동안 둘은 각자 2500만 원을 내서 모은 5000만 원의 자본금으로 버텼다. 친구들은 취직해 돈을 버는데 두 사람은 매출 ‘0원’인 회사에서 기술개발에만 매달렸다. 그때 제작비의 3분의 1을 CG에 썼다는 영화 ‘괴물’이 한국 영화의 흥행기록을 새로 세웠다. 시장은 충분한 것 같았다. 이제 기술을 본격적으로 팔아야 할 때였다.
한국 영화사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디즈니에 e메일을 보냈다. 이왕이면 최고와 함께하겠다는 오기도 발동했다. “우리가 끝내주는 CG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한번 써보시죠.” 답장이 없었다. 연락처를 알 수 있는 디즈니 사람들에게 계속 e메일을 보냈고, 소개를 받아 전화도 걸었다. 8개월을 매달린 끝에 간신히 연락이 닿았다. 한번 만나자는 얘기 끝에 디즈니에서 물었다. “그런데 직원이 몇 명이죠?” 차마 단둘이라고 얘기할 수 없었다. “다섯 명입니다.” 사업을 하려면 거짓말도 필요했다.
디즈니와 계약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날벼락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에프엑스기어의 기술은 이제 필요 없어요.” 이 대표는 “당신들도 기술은 최고라고 하지 않았느냐. 도대체 왜…”라며 따졌다. 디즈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가 픽사를 샀거든요.”
픽사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났던 시절 영화 ‘스타워즈’의 감독 조지 루커스로부터 인수한 CG 회사다. 이 회사는 ‘토이스토리’ ‘니모를 찾아서’ 같은 애니메이션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이 대표의 8개월에 걸친 긴 협상은 헛수고가 됐다.
○ 2007년, 슈렉3(제작비 800억 원)
앉아서 망할 수는 없었다. 이번엔 드림웍스와 접촉했다. “디즈니와 계약 직전까지 갔다”고 하니 다행히 먹혔다. 드림웍스는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디즈니의 가장 큰 경쟁사다. 마침 ‘슈렉3’의 개봉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일사천리로 계약이 진행됐다.
2007년 개봉한 슈렉3는 에프엑스기어에 처음으로 의미 있는 매출을 안겨줬다. 드림웍스는 슈렉3뿐 아니라 앞으로 개봉하는 모든 애니메이션에서 에프엑스기어의 기술을 쓰기로 했다. 이 해 에프엑스기어의 매출은 9억 원까지 올랐다. 직원도 12명으로 늘었다.
경사는 함께 몰려왔다. 드림웍스와의 계약 소식을 들은 일본 소프트뱅크가 20억 원을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숨통이 트였다. ▼ 누적 적자 40억원까지 치솟았지만, 온라인게임-스마트폰서 활로 찾아 ▼
○ 2009년, 불꽃처럼 나비처럼(제작비 95억 원)
하지만 좋은 시절은 잠시였다.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태극기 휘날리며, 괴물 등 제작비가 100억 원이 넘는 한국영화가 늘고 있으니 매출도 급증할 거라고 낙관했던 것이다. 이 대표는 “단순해도 너무 단순했다”며 “100억 원짜리 영화에서 CG를 10% 사용하면 1년에 영화 두세 편만 계약해도 매출이 20억∼30억 원 될 거라고 봤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제작비에 100억 원 넘게 들이는 한국영화 자체가 너무 적었다. 영화사들도 배우 몸값은 올려줘도 CG 제작비를 올릴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CG 중에서도 옷자락, 머리카락 등을 현실감 있게 나풀거리도록 만드는 에프엑스기어의 기술은 CG 전체에서도 아주 작은 부분이었다. 제작비의 10%는커녕 1%도 따내기 힘들었다.
그래서 아예 CG 제작스튜디오가 되기로 맘먹고 사업방향을 전환했다. 디자이너를 채용하고 직원을 50명 가까이 늘렸다. 그러고는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CG 작업을 수주했다. 5억 원짜리 사업이었다. 쉽지 않았다. 후반 작업에 공이 들어가고, 수정도 잦았다. 애초 계획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 결국 5억 원 사업을 완성하느라 15억 원을 썼다. 손실 10억 원. 일본 진출을 추진하다 또 10억 원을 날렸다. 기술은 독보적이었지만 경영엔 젬병이었다.
○ 2013년 미스터 고(제작비 225억 원)
2011년까지 누적 적자는 40억 원으로 치솟았다. 회사 문을 닫는 줄 알았다. 간신히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영화가 아니라 게임이었다. 엔씨소프트가 2009년 온라인게임 ‘아이온’을 선보이면서 에프엑스기어의 CG 기술을 썼다. 게임에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알아본 게임회사 넥슨도 에프엑스기어에 6억 원을 투자했다.
지난해부터는 스마트폰이 도움을 줬다.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각종 사용자환경(UI) 디자인을 할 때 애니메이션 효과를 쓰면서 에프엑스기어의 기술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대표는 “스티브 잡스의 픽사 때문에 초기에 고생했는데, 결국 잡스가 열어준 스마트폰 시장 덕분에 활로가 생겼다”고 말했다.
다음 달에는 이 회사의 CG 기술을 사용한 영화 ‘미스터 고’도 개봉된다. 가상의 고릴라를 CG로 만들어 낸 영화다. 영화와 스마트폰, 게임 등에 이르기까지 에프엑스기어의 CG 기술은 점점 쓰임새가 늘고 있다. 올해 매출은 50억 원을 내다보고 이익도 10억 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대표가 얘기하는 성공의 비결은 무지(無知)였다. “우리 기술의 특징은 시장이 작고 개발이 어렵다는 겁니다. 시장성이 없어 누구도 개발을 시작하지 않던 기술을 경영에 무지했던 내가 7년이나 붙잡고 매달린 덕분에 지금 쓰임새가 생기면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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