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죽어가는 소규모 상점들을 살리기 위해 금융 지원을 하고 세금 부담 등을 줄여주는 ‘골목 상권 살리기 캠페인’을 실시하고 있다. 골목상권 살리기 실험마을로 지정된 런던 남부 지역 크로이던의 상가를 찾은 정치인과 언론인들. 영국 실험마을 담당부서(DCLG) 제공
최요순 우리투자증권 런던법인장우리 옆집의 영국 신사는 매일 아침 마을 중심가 ‘하이 스트리트’까지 걸어가서 조그만 잡화점에서 신문을 사 온다. 신문을 구독해도 되는데 굳이 매일 동네 가게에 들르는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을 말하기에 앞서 얼마 전 방영된 코미디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다. 시골의 초라한 과일가게에서 벌어진 짤막한 우스갯소리로 시청자를 즐겁게 한 이야기다. 손님이 블랙베리를 들고 와 고장이 났다고 불평한다. 물론 휴대전화 블랙베리가 아닌 오디를 닮은 작은 과일인 블랙베리를 비닐 봉투에서 꺼내 보이며 환불을 요구한다. 가게 주인은 그 대신 애플을 권한다. 블랙베리, 애플은 모두 과일 이름이면서 동시에 스마트폰 브랜드라는 점에 착안해 만든 코미디물인데 골목상가에 접목한 것이다.
다시 옆집 신사 얘기로 돌아가자. 그는 아침에 산책 삼아 직접 가서 사면 그 가게에는 매상이 오르고 이는 곧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된다고 말했다. 그날 아침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헤드라인에 따라 구입할 신문의 종류와 부수를 결정한다. 그는 이런 작은 정성이 영국 소도시의 ‘하이 스트리트’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구멍가게를 살리고 그 명맥을 이어가는 데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믿는다.
영국에서 ‘하이 스트리트’로 불리는 거리는 무려 5410개라는 통계가 있다. 물건을 사고팔고, 정보를 주고받고, 친구를 만나 맥주 마시며 담소하는 장터 같기도 하다. 사랑방 거리와도 비슷한, 아주 생기 넘치던 시절에 생긴 작은 마을의 ‘읍내’ 같은 곳이다. 런던 시내에 있는 번화가인 옥스퍼드, 리전트 같은 곳은 하이 스트리트로 부르지 않는다.
영국 소매협회가 발표하는 ‘하이 스트리트 매출 통계’에는 작은 상점뿐 아니라 대형 상점의 매출 수치가 합산된다. ‘하이 스트리트’라는 이름을 넣은 것은 심정적으론 시골 소형매장 매출이 늘었으면 하는 기대 때문이라고 한다. 올해 5월 하이 스트리트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4% 늘었다고 한다. 이는 올해 3∼5월의 평균상승률인 2.5%보다도 높다. 물론 주요 도시의 대형 상점 매출이 상승을 주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매달 발표하는 이 수치는 일반 시민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점치는 잣대가 된다. 올해 상반기에 증가한 소매 매출의 상당 부분이 ‘DIY(Do It Yourself)’ 관련 제품으로, 직접 가구를 조립하거나 집을 단장하기 위한 재료였다고 한다. 이른바 ‘소비를 줄이기 위한 소비’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정책 당국에서도 향후 5년간 2% 미만의 소비 증가율을 예상하고 있으니 대형 매장이나 런던 시내 패션점보다는 골목 상권에 대한 걱정이 크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 재래시장이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듯이 영국 전역에서도 하루 20개의 소규모 상점이 문을 닫는다고 한다. “하이 스트리트는 죽었다!”라는 헤드라인이 자주 등장하는 와중에 전통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하이 스트리트 되살리기’ 캠페인을 주도하고 있다. 집권 보수당에선 하이 스트리트 담당 차관을 지정하고 이 캠페인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하이 스트리트 혁신 펀드’를 설정하고 전국에 실험마을 12곳을 선정해 금융지원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세제 혜택, 주차 규율 완화, 자유로운 건물용도 변경 등을 통해 중소 상인의 사업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BBC에선 이런 실험 마을을 기획 취재해 보도하면서 정부의 재정지원 과정과 독특한 마케팅 방법을 흥미롭게 소개한다. 주민들의 쇼핑 패턴이 바뀌어 자동차로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되니 환경 보호를 저절로 실천할 수 있다. 해당 지역 주민들에겐 할인 카드를 발급하고 포인트도 적립해준다. 거리에 방문객이 늘어나니 마을이 활기를 되찾고 신장개업하는 가게가 늘어나는 광경을 보고 시청자들은 흐뭇해한다. 오래 알고 지낸 과일가게 주인과 가벼운 농담을 하거나 이른 아침 잡화점에서 신문을 구입하며 “굿모닝!” 하는 즐거움을 모두가 꿈꾸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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