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주권자인 김모 씨는 최근 영주권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내년부터 한국의 금융계좌 정보가 미국 국세청(IRS)에 보고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는 한국 시중은행에 예치한 10억 원에서 발생하는 이자에 대해 13.2%의 이자소득세만 냈다. 1년에 한 번씩 미 재무부에 해외금융계좌를 신고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한 적이 없다. 한국 정부의 협조를 받지 않는 이상 미 재무부가 자신의 한국 계좌를 추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아서다.
내년부터 김 씨는 신고를 하지 않으면 이자소득의 30%를 징벌금(이자소득세 포함)으로 내야 한다. 사실 세금보다 더 두려운 건 그동안 제대로 계좌 신고를 하지 않은 데 따른 벌금 부과다. 고의로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10만 달러(약 1억1200만 원) 또는 미신고 금액의 50% 중 큰 금액을 내야 한다. 그는 “자녀 교육 문제로 영주권을 유지했는데 아이들도 다 컸고 경제활동 비중도 한국이 더 높다”면서 “괜히 과거 세금 문제로 불안해하기 싫다”고 말했다.
○ 분주한 자산가들
미국은 내년 7월부터 ‘해외금융계좌 납세순응법(FATCA)’을 발효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법이 시행되면 한국 금융회사들은 미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 중 5만 달러(약 5600만 원) 이상을 예치한 이들을 가려낸 뒤 이들의 계좌를 의무적으로 IRS에 신고해야 한다. FATCA 시행이 임박하면서 한국에 거액의 자금을 예치해둔 미 영주권자와 시민권자는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이들은 전문가와 상의해 ‘세금 폭탄’을 피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국내 은행에 20억 원을 넣어 놓은 미 영주권자 조모 씨는 고민 끝에 돈을 몽땅 현금으로 인출했다. 이 돈을 금고에 넣어 놓고 금융 계좌는 해지했다. 그는 “미국에서 살아야 해서 국적을 포기할 수도 없다”며 “일단 IRS에 계좌가 보고되면 그동안 세금 신고를 안 한 데 따른 벌금 부과를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아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최근 국내 시중은행 프라이빗뱅킹(PB) 센터에는 FATCA 시행을 앞두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문의하는 고객이 점차 늘고 있다. 한 은행 프라이빗뱅커는 “금값 하락에도 골드바 수요가 늘어난 데는 이런 고객들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주권자인 유모 씨는 고민 끝에 한국 계좌에 있는 돈을 모두 빼서 아들에게 주기로 했다. 아들은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다. 유 씨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이 돈을 아들 명의의 미국 은행 통장으로 여러 번에 걸쳐서 조금씩 넣어줄 것”이라며 “내 한국 계좌는 없앨 계획”이라고 말했다.
○ 역외 탈세자 막는 강력한 무기될 듯
한국 정부는 미국이 제시한 FATCA 방식 중 상호주의 모델을 채택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FATCA가 도입되면 5만 달러 이상을 미국 금융회사에 예치해 놓은 한국인들의 계좌 정보 역시 한국 국세청으로 통보된다.
현재 한국 정부는 미국과 FATCA 시행을 앞두고 세부안을 협상하고 있다. 강윤진 기획재정부 국제조세협력과장은 “작년에 양국의 장관들이 만나 상호주의 방식으로 하자고 합의했다”며 “FATCA가 시행되면 내년 6월 말 기준으로 해당 고객의 금융계좌 정보를 2015년 9월부터 서로 주고받게 된다”고 말했다.
지금은 개인과 법인이 보유한 해외금융계좌 잔액이 하루라도 10억 원을 초과하는 경우에만 관할 세무서에 신고하면 된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1년 해외 계좌를 갖고 있다고 신고한 개인은 211명(계좌잔액 9700억 원)이고, 2012년에는 302명(2조1000억 원)이었다.
국세청이 국내 거주자의 미국 계좌정보를 확보하면 훨씬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이자소득, 배당소득 등에 대해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개인이 신고하지 않는 한 국세청이 알기 어려워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는 이가 많지 않았다.
한 세무사는 “FATCA 시행을 앞두고 걱정이 많은 이들은 한국과 미국의 은행에 100만 달러(약 11억2000만 원) 이상을 예치해놓은 자산가가 대부분”이라며 “FATCA는 한국과 미국 국세청이 역외 탈세자를 대상으로 한 강력한 세원(稅源) 확보 조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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