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의 에너지기업 SK이노베이션은 1일부터 구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주지 않는다. 전 사원을 대상으로 지난달부터 ‘오후 6시 반 의무퇴근제’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후 6시면 ‘퇴근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30분 뒤에는 PC가 자동 종료된다. 지난 한 달간 직원 만족도는 90% 이상으로 나타났다.
LG전자도 세탁기 냉장고 등을 만드는 홈어플라이언스(HA)사업본부가 시작한 ‘수요일 오후 5시 퇴근제’를 최근 다른 사업부로 확대했다. HA사업본부는 조성진 사장의 지시에 따라 2월부터 매주 수요일 전원이 오후 5시에 강제 퇴근해왔다. 6개월이 지난 현재 서울 여의도 본사와 경남 창원공장의 수요일 5시 정시 퇴근율은 97%에 이른다. 지난달 직원 대상 조사 결과 90% 이상이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벤치마킹해 휴대전화를 담당하는 MC사업본부, 에어컨 생산을 맡는 AE사업본부는 격주 금요일, TV 등을 만드는 HE사업본부는 매주 금요일 오후 5시에 퇴근하고 있다.
직원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주려는 기업이 늘고 있다. 몇 년 전 가족친화경영 차원에서 도입한 ‘가정의 날’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경영진이 나서 야근을 강제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LG생활건강은 매일 오후 6시면, KCC는 오후 6시 반이면 본사 전체를 소등한다. 이마트 본사 역시 오후 6시면 ‘퇴근할 시간’이라는 사내방송과 함께 업무를 마무리하라는 뜻에서 노래를 틀어준다. 대상그룹도 오후 7시 이전 퇴근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현대해상은 매주 수요일을 ‘6시 정시 퇴근의 날’로 운영하고 있다. 매일유업 역시 격주로 수요일 오후 5시면 본사 직원부터 영업직까지 전원이 의무적으로 퇴근한다.
기업들이 야근을 금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 임원은 “불필요한 야근 문화 탓에 매년 수억 원의 수당이 낭비된다”며 “지출을 줄이려고 꼭 필요하지 않은 야근을 금지하고, 연월차휴가도 강제로 쓰게 한다”고 말했다.
생산성 향상이라는 목표도 있다. 특히 수요일 강제 퇴근을 시도하는 기업들은 한 주일의 중간인 수요일에 일찍 퇴근해 재충전하면 목, 금요일에도 지치지 않고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본다.
저녁을 ‘선물’ 받은 직장인들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짧아진 점심시간이다. 미국 직장인들처럼 30분 내에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업무에 복귀해 정시에 퇴근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이다. 여의도에서 김밥가게를 운영하는 최모 씨(45·여)는 “점심을 간단히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직장인이 많다”며 “회사로 배달을 시키는 경우도 늘었다”고 전했다.
야근을 금지한 기업의 직원들은 회의시간도 최대한 줄인다. 컨설팅업체에 다니는 김모 씨(29)는 “예전에는 고객회사 직원들과 종종 마라톤 회의를 했는데 지금은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미팅 자체를 줄이려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퇴근 후의 삶도 달라졌다. 가족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는 직장인이 늘었다. LG전자가 지난달 HA사업본부 직원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9%는 ‘정시 퇴근 후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고 했고, 24%는 ‘동기나 친구와 만난다’고 했다. 31%는 ‘취미생활 및 자기계발에 투자한다’고 답했다. 자신만의 시간을 활용하는 데 익숙지 않은 부장급 이상들은 취미 찾기가 새로운 고민거리가 됐다.
일부 기업에선 야근 금지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행정 절차만 낳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지난해 야근을 금지한 A사는 오후 6시면 강제 소등을 하지만 사전에 승인받은 직원에게는 예외적으로 불을 켜준다. 1년이 지났으나 이 회사 직원 대부분은 ‘왜 내가 야근을 해야 하는지’ 사유서를 써 일주일 단위로 임원에게 제출한다. 이 회사 박모 씨는 “부서 막내들이 상사의 야근 사유서까지 써 한꺼번에 제출하고 있다”며 “야근 금지 제도를 없애 사유서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푸념했다.
은행권도 마찬가지다. 모 은행 이모 차장(47)은 “초과 근무를 줄인다며 오후 7∼8시에 PC를 자동 종료시키지만 그 뒤엔 PC가 필요하지 않은 잔업을 밤늦게까지 한다”고 털어놓았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김용환 인턴기자 중국 베이징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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