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11시 부산 중구 중앙동 한진해운빌딩 23층 운항팀 사무실. 일등항해사 출신 베테랑 직원 10여 명이 모니터 2대씩을 앞에 놓고 ‘색깔 블록 쌓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들은 컨테이너선 ‘한진 유럽호’ 등을 포함해 여러 선박의 평면도를 모니터에 띄워놓고 알록달록한 컨테이너 모양 블록을 이리저리 옮기며 위치를 정하고 있었다.
이들이 맡고 있는 업무는 ‘스토이지 플랜(Stowage Plan·배의 짐칸에 화물을 배치하는 작업)’을 짜는 것이다. 모니터에 표현된 색깔 블록은 선박에 실릴 컨테이너를 뜻한다. 김규만 한진해운 컨테이너 운항팀 과장(36)은 “스토이지 플랜을 짤 때는 컨테이너 높이, 선박 및 화물 무게, 기항지의 사용 가능한 크레인 대수, 운항 경로 등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 화물 특성을 고려해 배치
한진 유럽호는 부산 신항만 한진해운 터미널에서 출항해 중국 상하이(上海), 싱가포르, 스페인 알제시라스, 독일 함부르크 등을 거쳐 부산으로 돌아오는 1만3100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급 배다. 한진 유럽호는 길이 366m, 폭 48.2m, 높이 29.85m로 국내 해운사가 보유하고 있는 선박 중 최대 규모다. 배가 큰 데다 전체 출항 기간에 걸쳐 안전성을 추구하다 보니 스토이지 플랜을 짤 때도 세계 각지 화물의 특성을 고려한다.
싱가포르에 내려질 컨테이너는 배 중앙 부분에 싣는 게 효율적이다. 싱가포르에서 실려 유럽으로 향할 화물이 호주 인도네시아 등에서 생산된 원자재가 많아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이다. 정진옥 한진해운 운항관리파트 과장은 “기관실, 조타실, 선원 숙소 등이 있는 선미(船尾) 부분이 선수(船首)보다 무겁다”며 “배의 균형을 잡으려고 무거운 화물을 배 중앙에 배치해 지그시 눌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선전(深(수,천))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화물은 섬유나 의류 등 비교적 가벼운 화물이 많아 배의 앞부분이나 뒷부분에 주로 싣는다.
최근에는 살아있는 생선, 해산물 등이 담긴 냉동화물, 반도체나 전자제품 등 다양한 특수화물도 늘어나고 있어 스토이지 플랜을 짜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한진해운 관계자는 “아시아에서 출발해 유럽에 도착하는 1만 TEU급 이상 선박 화물의 경우 통상 3000TEU가량이 특수화물”이라고 말했다. ○ 안전과 절약 ‘두 마리 토끼’
스토이지 플랜은 운항 비용을 아끼면서도 안전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해운업계는 스토이지 플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스토이지 플래닝이 잘돼 무게가 고르게 분산되면 선박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배에 채우는 물인 ‘선박평형수(Ballast water)’를 덜 넣어도 된다. 이렇게 되면 전체 선박 무게가 줄어들어 연료를 절약할 수 있다.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데 편리하도록 화물을 배치해 정박시간을 줄이면 그만큼 항해하는 데 시간적 여유도 확보할 수 있다. 천천히 선박을 운항하면 연료 절감 효과도 얻을 수 있어 일석이조(一石二鳥)다. 윤종혁 한진해운 운항팀 과장은 “수에즈 운하에서는 갑판 상부에 쌓인 컨테이너 높이에 따라 통행료가 차이나기도 한다”며 “스토이지 플래닝을 잘해 적재물 높이를 낮추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전성 측면에서도 스토이지 플레닝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화물을 실었을 때 무게중심이 한쪽에 치우치면 배는 안정감을 잃고 요동을 친다. 심하면 화물이 균형을 잃고 쏟아질 수 있다.
특히 배 앞부분에 무거운 화물을 많이 배치하면 배를 구성하는 철판의 피로도가 높아져 배가 두 동강 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올해 6월 일본 해운회사 MOL 소속 선박이 인도양에서 두 동강이 났을 때 해운업계 일각에서는 스토이지 플랜에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냐고 분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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