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후 경기 동두천시 생연동 J주유소. 3년 전 문을 닫은 이 주유소는 마치 폐가를 연상케 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모시겠습니다’라고 쓰인 입간판은 한쪽 바닥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쓰러져 있었다. 뒤쪽 공터에는 깨진 소주병과 불에 탄 쓰레기 더미, 담배꽁초가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외부인이나 주변 지역 청소년이 방치된 주유소를 들락거리며 이용한 흔적인 듯 보였다. 주유소 인근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김모 씨는 “장기간 방치된 주유소 때문에 주민들은 이곳을 피해 다닌다”며 “손님이 떨어져 걱정이다”라고 하소연했다.
다른 휴업 주유소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J주유소에서 약 8km 떨어진 H주유소는 주변 도로를 통행하는 화물차들의 임시 주차장처럼 쓰이고 있었다. 이 주유소 옆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는 임무영 씨(56)는 “(휴업 주유소의) 철문을 떼어 가려고 좀도둑이 들끓는다는 소문이 돌았다”며 “마을 사람들에게도 휴업 주유소가 큰 고민거리”라고 말했다.
전체 주유소가 25곳인 동두천시에만 휴업 중인 주유소가 5곳이다. 5곳 중 1곳이 휴업한 셈이다.
○ 폐업 비용 없어 방치된 주유소
주유소 시장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문을 닫는 주유소가 급증하고 있다. 특히 국도 주변에 난립했던 지방 주유소 상당수는 평균 1억5000만 원가량 드는 폐업 비용(건물 철거비용 및 토양오염 복원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장기 휴업 상태로 방치돼 있다.
동아일보가 7월 말 현재 휴업 중인 전국 419개 주유소 현황을 분석한 결과 전국에서 휴업한 주유소가 가장 많은 곳은 전북 전주시로 나타났다. 전주시에선 12곳이 휴업했다. 이어 전북 익산시, 남원시와 부안군(이상 9곳), 전남 나주시(8곳) 순이었다.
전체 주유소 대비 휴업 주유소 비율은 23곳 중 5곳이 휴업한 경남 의령군이 21.7%로 가장 높았다. 이어 △경기 동두천시(20.0%) △강원 양양군(19.2%) △전북 부안군(17.0%) △강원 영월군(15.6%) 순이었다.
지방에서 휴업한 주유소 중 상당수는 대도시와 달리 폐업이나 업종 전환이 쉽지 않아 장기간 방치될 수밖에 없다. 윤원철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대도시 주유소는 폐업하더라도 입지가 좋아 다른 업종으로 전환할 수 있지만 지방 주유소는 폐업 비용을 마련하기도, 폐업한 뒤 다른 사업을 하기도 쉽지 않아 휴업이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방치된 휴업 주유소는 유사 석유 판매장으로 전락하는 일도 적지 않다. 휴업 주유소의 경우 주유기 등 영업을 위한 기반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영업 중인 주유소에 비해 임차 비용도 싸 가짜석유 업자들에겐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한국석유관리원 관계자는 “단기간 운영하고 적발되기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가짜석유 업자들은 휴업한 주유소를 빌리는 게 가장 손쉬운 판매 방법”이라고 말했다.
주유기와 기름탱크 등이 철거되지 않은 채 장기간 방치되면 토양을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다. 박종문 포스텍 화학공학과 교수는 “주유기나 주유탱크에서 기름을 뺐다 하더라도 100% 제거됐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토양 오염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 “인건비도 못 건질 정도”
주유소 업계와 석유 전문가들은 시장 규모 및 수익성을 감안할 때 전국적으로 필요한 주유소는 7000∼8000곳. 하지만 현재 전국적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 주유소는 1만2803곳이다. 4800∼5800곳 정도가 과잉인 셈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도 문을 닫는 주유소가 속출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주유소협회에 따르면 올 상반기(1∼6월) 폐업한 주유소는 185곳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06개)보다 74%나 증가했다.
최근 한국석유관리원이 발표한 ‘주유소 손익분기점 산정’ 자료를 보면 전국 1만2803개 주유소 중 49.5%인 6337개 업소가 수익을 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주유소들은 매출량이 전국 월평균 최소 운영 판매량인 713드럼(14만2600L)에 미치지 못했다. 4103개(32.0%) 업소는 판매량이 520드럼(10만4000L)이 되지 않아 인건비조차 못 건질 정도로 수익성이 악화된 상태다. 주유소협회 자체 조사에서도 2000년대 초반 3%대이던 주유소 평균 영업이익률이 2011년엔 0.43%로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강원 횡성군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강모 씨는 “한때 주유소를 한다고 하면 부자 소리 들었는데 이젠 다 옛말”이라며 “여름 휴가철이 가장 성수기인데도 아르바이트생을 부르지 못하고 온 가족이 달라붙어 있다”고 했다. ▼ 전국 주유소 절반인 6337곳 적자 ▼
“한때 주유소하면 부자소리 들었는데… 3분의 1 사라질것”
20여 년간 경기 수원시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던 박모 씨는 주변에 주유소가 늘어나면서 수익이 점차 줄어들자 직접 운영하는 것을
포기하고 2년 전 다른 사람에게 주유소를 임대했다. 박 씨는 “얼마 되지 않는 수입도 카드 수수료를 떼고 나면 손에 쥐는 게 거의
없다”며 “20년 넘게 한 일이지만 워낙 상황이 나쁘다 보니 미련도 남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최근 GS칼텍스가
직영 주유소 145곳을 매각하기로 하는 등 정유업체도 갖고 있던 주유소를 내다 파는 형편이다. 한 정유업체 관계자는 “일본에선
2000년대 초 6만 곳에 이르던 주유소가 10년 동안 3만4000곳으로 줄었다”며 “회사 입장에서도 수익이 나지 않는 주유소를
갖고 있는 게 큰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 폐업 지원이 필요하다지만
주유소 업계 일각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폐업 비용을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휴업에 따른 부작용이 사회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만큼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새누리당 이현재 의원이 주유소 폐업 시 정부가 비용 일부를 지원해 주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업종과의 형평성 때문에 현실화되긴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주유소협회 측은 공제조합을 구성해 주유소 폐업자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전재완 산업연구원 환경에너지산업팀장은 “주유소가 공급 과잉 상태인 만큼 구조조정은 당연한 수순”이라며 “구조조정이 큰 부작용 없이 이뤄질 수 있는 방안을 업계나 정부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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