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유한킴벌리 본사 내 사무실. 한쪽에는 카페테리아처럼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다른 한쪽의 넓은 공간에는 칸막이 없는 빈 책상 몇 개가 옹기종기 있었다. 책상이나 테이블 어디에도 서류뭉치, 서랍, 개인 소지품 등은 보이지 않았다.
이 회사는 2011년부터 모든 사무실에 ‘스마트 오피스’ 시스템을 구축했다. 모든 임직원은 자신의 자리가 없기 때문에 개인사물함에서 노트북과 필요한 서류를 챙긴 뒤 근무할 자리를 스스로 선택해 앉는다. 중요한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보안이 필요한 경우는 외부와 차단된 ‘집중업무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 공간에 주목한 기업
창의적 업무 공간을 만드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키워드는 ‘오픈 오피스’, ‘협업 공간 확대’, ‘맞춤형 공간 구성’이다.
포스코는 2011년 도입한 변동좌석제를 확대하고 있다. 개인 사무공간을 줄이면서 확보한 공간은 작은 회의실, 라운지, 카페테리아, 도서관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포스코는 2009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포스코센터 4층에 ‘포레카’(포스코+유레카)라는 공간도 마련했다. 미니당구대, 게임기, 커피전문점 등을 갖춘 이곳은 직원들의 창의력 향상을 위해 만든 놀이터이자 회의실이다. 때론 개인 사무실 역할도 한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네이버 본사는 각 층마다 ‘하이브’(벌집)라는 커뮤니케이션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정보기술(IT)기업 특성상 기획 디자인 개발 홍보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의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할 공간이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네이버는 기업 공간 배치를 연구하는 ‘SPX(Space Experience)팀’까지 운영하고 있다.
○ 공간으로 기업문화를 표현
기업들이 공간 혁신에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업무 효율성 때문이다. 유한킴벌리가 최근 직원 설문조사를 한 결과 변동좌석제 등 업무 공간을 혁신한 후 이전보다 업무 집중도가 높아졌다는 응답이 77%였다. 다른 본부나 팀과의 협업이 늘어났다는 응답도 79%나 됐다. 김주영 유한킴벌리 인사기획팀 차장은 “임원과 한 공간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의견을 구할 수 있어 의사결정이 빨라졌다”며 “탁 트인 공간에서 다양한 구성원과 함께 일하다 보니 다른 팀의 협조나 조언을 구하기도 쉬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업무 공간 변화는 기업문화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사무용가구 전문업체 퍼시스의 박정희 사무환경연구팀장은 “기업문화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물리적 환경인 업무 공간은 눈에 보인다”며 “업무 공간은 기업문화를 구성원들에게 표현하는 보디랭귀지”라고 말했다.
제주항공은 업무 공간 특성이 기업문화에 영향을 준 대표적 사례다. 2005년 설립된 제주항공은 서울 강서구 공항동 김포공항 국제화물청사 3층에 본사 직원 8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가로로 100m 정도 되는 ‘한 일(一)’자 형태의 사무실에 운항본부와 경영본부 영업본부 등을 나란히 배치했다. 한가운데는 직원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라운지를 만들었다. 양성진 제주항공 상무는 “항공사 조직문화의 가장 큰 문제는 조종사와 객실승무원, 지상에서 근무하는 직원 간 소통이 힘들다는 것”이라며 “제주항공은 한 층에 모든 구성원이 모여 있고, 자연스럽게 라운지에서 어울리다 보니 소통문화가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공간 컨설팅 업체 이트너스의 박세정 연구소장은 “조직문화를 바꾸기 위해선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며 “공간을 바꾸면 훨씬 가시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조언했다.
○ “우리 사무실도 구글-페이스북처럼”
업무 공간 혁신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사무환경 컨설팅 시장도 점차 커지고 있다. 퍼시스의 경우 올해 1∼8월 컨설팅 의뢰 건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3%나 늘어났다. 퍼시스 관계자는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자유로운 업무 환경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국내 기업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며 “최근에는 지방 혁신도시의 신사옥으로 내려가는 공기업이나 서울 마포구 상암DMC에 입주할 민간기업의 문의가 많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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