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영국 중부 도시 노팅엄 시. 영국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산업혁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이곳에 영국 전역의 이목이 집중됐다. 7월 취임한 마크 카니 영국은행(BOE) 총재의 첫 공식연설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설이 열린 노팅엄대 콘퍼런스센터는 영국의 은행가와 기업 관계자,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취재진 500여 명으로 가득 찼다.
영국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카니 총재가 아침 식사로 닭가슴살 샐러드와 초콜릿 타르트를 먹었다는 소식부터 테이블에 놓인 물잔 색깔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지난 5년간 미국이 5%, 호주가 13% 성장할 때 영국 경제는 3%를 밑도는 성장에 그쳤습니다. 영국은행은 현재 7.8%인 실업률이 적어도 7%로 떨어질 때까지는 금리 인상에 대한 검토에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카니 총재가 연설 시작과 함께 경기부양 방침을 재확인하자 곳곳에서 영국 기업인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영국 파운드화의 달러 대비 환율이 치솟기(파운드화 가치는 하락) 시작하며 두 달여 만에 최고치로 뛰어 올랐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에도 카니 총재는 영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돈을 풀 것이라는 시장의 예상이 반영된 것이다.
영국 언론들은 캐나다 출신인 카니 총재에게 ‘할리우드 스타’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영국은행이 설립 319년 만에 자존심을 꺾고 영입한 최초의 외국인 중앙은행 총재인 데다 근엄하고 과묵한 과거 영국은행 총재들과 달리 잘생긴 외모와 재치 있는 입담을 자랑하는 그가 영화배우처럼 화제를 몰고 다닌다는 이유에서다.
카니 총재가 펼칠 통화정책에 대해서도 글로벌 경제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물가 관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기존 중앙은행들과 달리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 시절부터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통화정책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던 그가 전례 없는 거대한 경제 실험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에서다. 카니 총재와 캐나다 중앙은행에서 함께 일했던 스콧 레이드 캐나다 하원의원은 “그는 사자처럼 런던 금융가를 뒤흔들어 놓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 파격 인사 실험에 나선 세계 중앙은행
최근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대담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 경제 전체에 막대한 파급효과를 불러오는 금리를 다루는 탓에 중세시대 견고한 성처럼 폐쇄적이고 보수적이었던 중앙은행이 장기화된 세계 경제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파격적인 실험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중앙은행 변신의 조짐은 전통을 깬 총재 인사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기업들이 글로벌 리크루팅 경쟁을 통해 전문경영인을 ‘모셔오는’ 것처럼 세계 주요은행들이 총재를 찾기 위해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은행의 카니 총재다.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카니 총재는 미국의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에서 10여 년간 근무한 뒤 2008년 42세의 나이로 최연소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에 오른 인물이다.
영국은행은 그동안 영국 내 외부 전문가에게도 총재직을 좀처럼 개방하지 않아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중앙은행으로 꼽혔다. 전임자인 머빈 킹 전 총재(재임기간 2003∼2013년)는 1998년부터 5년 넘게 부총재를 지냈고, 킹 전 총재의 전임자인 에디 조지 전 총재(1993∼2003년)도 1962년 영국은행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2009년 성장률이 ―4.0%로 뒷걸음질친 데 이어 2011, 2012년 연속 0% 성장에 그치자 영국은행은 전통을 깨고 파격적인 연봉을 제시하며 캐나다를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구한 일등공신으로 꼽힌 카니 총재를 총재로 영입했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로 금융시장이 혼란에 휩싸이면서 경제위기 우려가 커지고 있는 인도는 대대로 중앙은행 내부 출신을 총재에 앉히는 관행을 깨고 라구람 라잔 미국 시카고대 교수를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했다. 4일 취임을 앞두고 지난달 말부터 사실상 총재로서의 업무에 들어간 라잔 총재는 인도를 빠져나가고 있는 달러 유출러시를 막기 위해 ‘애국채권’ 발행을 언급하는 등 환율 방어에 과감한 정책을 펼 계획임을 예고하고 있다.
카니와 라잔 두 총재의 공통점은 경제흐름을 예측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갖췄다는 점이다. 라잔 총재는 물가안정목표제를 유행시켰던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미국발(發)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해 명성을 얻었다. 카니 총재 역시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 취임 직후인 2008년 3월 경제위기 조짐을 내다보고 과감하게 금리를 내려 그해 9월 시작된 미국 리먼브러더스 사태의 충격을 최소화했다.
○ 금리 조율사에서 경제위기 소방수로
현재 세계경제의 이목이 가장 집중되고 있는 곳은 미국 연준이다. 내년 1월 말 임기가 끝나는 벤 버냉키 의장의 후임이 곧 지명되기 때문이다. 차기 연준 의장 자리를 두고 재닛 옐런 연준 부의장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 1기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물가안정만 맡던 소극적 역할 탈피 경제위기 대응-성장-고용까지 맡아
옐런 부의장이 의장에 선출되면 미국 연준은 처음으로 여성 총재를 맞게 된다. 현재 세계 중앙은행 가운데 여성 총재를 임명한 곳은 러시아와 말레이시아 2곳에 불과할 정도로 여성 중앙은행장은 드물다. ‘부드러운 리더십’을 앞세운 연준의 2인자 옐런 부의장은 버냉키 의장과 함께 양적완화 정책을 고안한 주인공이다. 시장에서는 옐런 부의장이 의장이 될 경우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시기가 다소 늦춰질 수도 있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반면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유지해왔다. 따라서 서머스 전 장관이 의장이 되면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가 조기에 실시될 수도 있다.
한은 관계자는 “차기 연준 의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양적완화 축소 시기가 빨라질 수 있고 앞으로 연준의 향후 움직임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은행들의 변신은 통화정책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통화정책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금리를 결정할 때까지 ‘비밀주의’로 일관했던 과거와 달리 과감하게 통화정책을 예고하는 중앙은행들이 늘고 있다.
실제로 영국은행은 카니 총재 취임과 함께 7월부터 ‘선제적 안내(forward guidance)’ 제도를 도입했다. ‘선제적 안내’는 카니 총재가 “실업률이 7%까지 떨어지지 않으면 금리를 올리지 않겠다”는 금리 인상의 조건을 제시한 것처럼 실업률이나 물가 기준을 제시해 장기적인 금리 방향을 사전에 알려주는 것이다. 통화정책 방향을 사전에 예고하면 금융시장이 미리 움직여 정책 효과가 사라진다는 인식 탓에 중앙은행 총재가 금리 방향을 예고하는 것을 금기시해왔던 그동안의 관행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변화다.
미국 연준이나 유럽중앙은행(ECB) 역시 통화정책 방향 예고가 점차 노골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탈리아은행(BOI) 총재 시절 대표적 ‘물가 파수꾼’으로 평가받던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유럽 재정위기를 거치며 채권 매입 등 과거 중앙은행이 기피했던 과감한 시장 개입 정책을 펴고 있는데 7월부터는 아예 금리결정 방향을 예고하는 ‘선제적 안내’에 나섰다.
버냉키 연준 의장 역시 미국 양적완화 축소 조짐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혼란을 거듭하자 7월 국회 청문회에서 “미국의 실업률이 7%로 낮아지면 양적완화를 중단할 수 있다”며 명시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과감한 변신에 나서고 있는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 환경이 급격히 변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등 신흥국의 부상으로 세계 경제가 성장세를 구가하면서 물가만 안정시키면 됐던 중앙은행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 저금리 기조가 고착화되자 과감한 정책으로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역할까지 맡게 됐다. 중앙은행 총재의 역할이 과거 금리를 통해 통화량을 조절하던 ‘조율사’에서 경제 위기 극복의 최전선에 선 ‘소방수’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각국이 사실상 제로 금리 수준으로까지 금리를 낮췄는데도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에 물가가 하락하는 것)’ 우려가 나올 정도로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자 중앙은행들은 물가에 맞춰져 있던 정책 목표를 서서히 성장과 고용으로 옮겨 가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성장률과 고용 등 정부가 주로 다루는 경제정책 목표에서 한발 떨어진 태도를 유지하던 중앙은행들이 ‘친(親)정부’라는 비난까지 감수하며 성장률을 끌어 올리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스티븐 킹 HSBC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한 기고문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시대도 끝났다”며 “글로벌 경제위기를 계기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패러다임을 재정립해야 할 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경제전문가들과 시장에서는 경제 흐름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정부보다 중앙은행을 봐야 한다는 평가도 나온다.
오정근 고려대 교수(경제학)는 “중앙은행은 한동안 성장과 금융시장 안정을 중시하는 인물들이 이끌게 될 가능성이 높다”며 “글로벌 금융위기 과정에서 워낙 비상조치들을 많이 취해 과거 중앙은행으로 돌아가려 해도 상당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도 영국은행 등이 펼치는 거대한 경제실험이 어떤 결과를 낼지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라며 “중앙은행이 경제 흐름을 주도하는 현상이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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