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0세인 김모 씨는 지난달 급히 목돈을 쓸 일이 생겨 한 시중은행에 주택담보대출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매달 꼬박꼬박 연금을 받는 데다 신용등급이 높은데도 은행은 “고령자에게는 대출이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김 씨는 “그런 규정이 있다면 문서로 보여 달라”고 요구했지만 은행은 거부했다. 김 씨는 “회사 다닐 때 이 은행을 자주 이용했고 연체 이력도 없는데 늙었다고 대출을 안 해주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대출 퇴짜를 맞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베이비부머 은퇴와 맞물려 경제력을 갖춘 고령층이 금융사의 주 고객으로 떠올랐지만 정작 이들은 대출창구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
○ 노인은 ‘추가심사’ 대상
금융 당국은 금융사들이 나이, 성별, 학력, 장애 등을 근거로 대출을 차별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지난해 신한은행이 학력에 따라 대출에 차등을 두고 KDB산업은행이 대출취급 제한 연령을 내규에 못 박아 놓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금융당국이 종합점검에 착수했다. 금융감독원과 전국은행연합회는 당시 점검을 바탕으로 지난해 10월 ‘대출기준 모범규준’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 모범규준을 지키지 않으면 제재를 받지만 일부 금융회사들은 잘못된 관행을 고치지 않고 있다. 금감원 조사 결과 시중 은행 3곳을 비롯한 53개 금융사의 269개 대출상품이 불합리한 연령차별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시중은행은 만 60세 이상이 대출을 신청할 경우 지점이 승인해도 본점 추가심사를 거친 뒤에야 돈을 빌려준다. 다른 은행은 대출자가 만 55세가 넘으면 다른 조건과 상관없이 일단 ‘재심사 대상’으로 분류한다. 만 60세가 넘으면 신용대출의 한도를 일괄적으로 줄이는 은행도 있다.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의 차별도 여전하다. 한 저축은행은 대출신청자가 만 58세를 넘을 경우 ‘정밀 신용평가 심사대상’으로 분류한다. 일부 카드사는 젊은층에게는 자동승인대출(카드론)을 제공하면서도 고령층에는 별도로 개별심사 절차를 둬 대출을 사실상 거절하고 있다. ○ 예금 많이 해도 차별당하는 고령층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고령층의 경제력이 취약했던 시대에 만들어진 대출기준이 그냥 이어지다 보니 문제가 불거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과거 노인들은 자식들에게 받는 용돈 외에는 별다른 경제적 기반이 없고 평균수명도 짧아 은행들이 대출 심사를 까다롭게 했다.
하지만 요즘 고령층은 과거와 달리 고정수입이 있는 경우가 많다. 통계청에 따르면 연금수령자는 2008년 5월 264만 명에서 올 5월 511만 명으로 5년 새 93.6% 증가했다. 금융자산 보유 규모도 늘어나 6월 말 기준 60세 이상 고령층이 금융사에 맡긴 예금은 257조6000억 원으로 전체 예금의 34.8%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인구 비율(19.9%)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고령층의 예금은 최근 3년간 9.7% 증가했다.
고령층의 연체율도 젊은층과 크게 다르지 않다. 60세 이상의 대출액은 152조3000억 원으로 3년간 17.7% 증가했다. 이들의 연체율은 2.01%로 60세 미만 연체율(1.92%)과 큰 차이가 없다.
이상구 금감원 일반은행검사국장은 “고령층은 은행의 실적 기여도가 높고 건전성에도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데도 차별을 받는 사례가 일부 나타나고 있다”며 “대출취급지침과 업무 매뉴얼을 고쳐 불합리한 영업관행을 개선하도록 지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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