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먹거리’에서 시장규모 2조원 ‘온국민 음식’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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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 50돌 맞은 라면의 역사

라면 한 봉지에 담긴 면의 길이는 평균 50m. 한국 라면의 역사도 올해로 ‘지천명(知天命)’인 50주년이 된다. 이달 15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삼양라면’이 나온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라면은 1963년 부족한 쌀 대신 서민의 배를 채워주는 식품으로 시작해 지금은 연간 시장 규모 2조 원을 바라볼 정도로 성장했다.

○ 1960, 70년대 도약기, 1980년대 전성기 맞아

1960년대 초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현 명예회장)은 서울 남대문시장 앞에서 한 그릇에 5원 하던 꿀꿀이죽을 먹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예전에 일본에서 먹어 봤던 라면이 떠올랐다. 일본에서는 1958년 인스턴트 라면이 첫선을 보였다.

보릿고개가 아직도 남았던 당시, 전 회장은 심각한 식량 문제를 라면이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부를 설득했다. 이후 일본 ‘묘조(明星)식품’으로부터 기계와 기술을 도입해 1963년 9월 15일 100g짜리 삼양라면을 내놓았다. 당시 1봉지 가격은 10원이었다.

쌀과 보리를 주식으로 먹던 사람들은 밀가루 음식인 라면을 낯설어했다. 삼양라면 관계자는 “초창기에는 극장이나 공원 등에서 무료 시식회를 1년 동안 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라면은 곧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삼양라면 사사(社史)는 ‘라면이 1963년에는 쌀 3800석, 1976년에는 145만8000석을 대체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전한다.

삼양라면이 나온 지 2년 뒤인 1965년, 농심의 전신인 롯데공업이 라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롯데라면’을 시작으로 ‘롯데소고기라면’,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코미디언 구봉서 곽규석의 광고로 유명한 ‘농심라면’ 등의 히트작을 냈다. 롯데공업은 1978년 회사 이름을 ‘농심’으로 바꿨다.

1980년대는 한국 라면 산업의 최고 전성기이자 격변기였다. 농심은 사발면(1981년)과 너구리(1982년), 신라면(1986년) 등 히트상품의 인기에 힘입어 1985년 3월 처음으로 삼양을 뛰어넘어 라면 시장 1위에 올랐다.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에 라면 시장이 가능성을 보이자 많은 업체들이 라면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야쿠르트는 1983년, 청보는 1985년, 빙그레는 1986년, 오뚜기는 1987년(청보 인수합병) 각각 라면 사업을 시작했다.

○ 우지 파동 등 시련 겪고 ‘매출 2조 원’ 시대로

라면 역사에는 어두운 면도 있었다. 1989년 검찰은 삼양식품이 ‘공업용 우지(牛脂·쇠고기 기름)’를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이 무죄를 선고하며 오명을 벗을 수 있었지만 삼양식품은 큰 피해를 본 후 였다.

1998년 국내 라면 시장은 처음으로 매출 1조 원을 넘었다. 2003년 빙그레가 라면 사업을 접겠다고 발표하자 농심, 삼양식품, 오뚜기, 한국야쿠르트 등 4개사의 경쟁체제가 굳어졌다.

2000년대는 튀기지 않은 이른바 ‘생면’과 2000원 가까운 ‘고급’ 제품들이 여성 고객과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다. 2011년 한국야쿠르트의 ‘꼬꼬면’이나 삼양식품의 ‘나가사끼 짬뽕’으로 대표되는 ‘하얀 국물’ 열풍은 소비자들 입맛이 다양해진 시대에 ‘라면 국물=빨간색의 얼큰한 맛’이라는 고정 관념을 깨는 계기가 됐다.

첫 제품이 나온 지 50년이 흐른 지금 삼양식품은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기름에 튀기지 않고 오븐에 구운 ‘구운면’을 내놨다. 업계는 올해 처음으로 라면 시장 규모가 2조 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라면#인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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