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 지어 다니는 남극의 펭귄들은 먹잇감을 구하려 바다로 뛰어들어야 할 때가 되면 모두 머뭇거린다. 바다표범이나 범고래 같은 천적이 두려워서다. 하지만 용감한 펭귄 한 마리가 먼저 뛰어들면 일제히 따라 들어간다. 이처럼 조직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용기 있는 도전자를 ‘최초의 펭귄(The First Penguin)’이라 부른다. 비록 천적에게 잡아먹혀 실패할 수도 있지만 다른 펭귄들에게 도전 정신을 불어넣는 역할 자체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기업에도 용감한 펭귄들은 있다. 그리고 최근 이런 최초의 펭귄들을 찾아내 시상하고 공개적으로 축하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실패하더라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고 반드시 그 원인을 분석해 동료들과 공유함으로써 ‘성공보다 가치 있는 실패’를 즐기라는 의미다.
13일 경기 화성시 석우동 한국3M의 기술연구소 강당에는 김치득 연구소장(부사장)과 150여 명의 연구원 전원이 모였다. 이 연구소의 가장 중요한 시상식인 ‘펭귄 어워드’가 열리는 날이었다. 2003년 제정된 펭귄 어워드는 한국3M 연구원이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 하는 자랑스러운 상이다. 한국3M의 대표적인 스테디셀러 ‘포스트잇’과 ‘습윤 밴드’도 사실은 접착제나 반창고를 만들려다 실패한 뒤 탄생한 작품이다. 이곳 연구원들이 ‘실패에서 배운다’는 교훈을 항상 마음에 새기는 이유다. 한국3M은 분기마다 펭귄 어워드 지원자를 모집해 실무급 연구원 9명의 평가를 거쳐 수상자를 정한다. 수상자는 인사평가에 가점을 받고, ‘펭귄 주차장’ 한 칸을 한 분기 동안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이날 2분기(4∼6월) 펭귄상은 허은광 책임연구원에게 돌아갔다. “2분기 실패자 허은광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해 시상식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그는 자신의 연구 프로젝트, 실패로 결론 낸 이유,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교훈을 동료들 앞에서 발표했다. 허 연구원이 개발한 제품은 휴대전화의 필수 부품인 페라이트 시트. 1년 6개월간의 연구 끝에 유연성과 전파 흡수성이 뛰어난 세라믹 재질의 페라이트 시트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양산 라인을 갖춘 제조업체까지 선정했다. 완벽한 성공처럼 보였지만 갑작스레 그 제조업체가 한국3M이 납품하려던 대기업의 협력업체로 선정되면서 계약은 자동 무산됐다. ▼ 한국3M-포스코 “실패 속에 아이디어 넘쳐” ▼
허 연구원은 “개발자로선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실패”라며 “연구 결과가 실제 수익으로 이어지려면 시장 상황과 납품 체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대비한 플랜B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김 연구소장은 “일부러 실패한 것이 아닌 한 경영진이 실패자를 질책해서는 결코 안 된다. 단, 그 실패로부터 얻은 교훈을 동료들에게도 알려 같은 실패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정신은 3M이 111년 동안 지켜 온 기업 철학”이라고 강조했다.
포스코 역시 지난달 처음으로 ‘실패 상’을 만들어 1000만 원의 포상금을 전달했다. 실제로 현장에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개발 과정에서 얻은 새로운 노하우를 향후 기술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뜻에서 의미 있는 실패작에 주는 상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더라도 실패하기까지의 과정 자체를 회사가 인정해 줌으로써 조직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더 다양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독려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는 걸음마 단계이지만 외국 기업들은 일찌감치 실패 격려 제도를 도입했다. 미국의 산업디자인 기업인 아이데오는 직원들에게 ‘실패할 수 있는 권리(license to fail)’를 주고 여러 번의 실패가 창의적인 성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또 ‘빨리, 많이 실패할 수 있는 12가지 방법’을 교육해 효과적인 실패 방법론을 공유한다. 혼다는 ‘실패 왕’을 선발하고, BMW는 ‘이달의 창의적 실수 상’을 선정해 포상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실패는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능이지만 실패를 숨기거나 무시하면 유사한 실패가 반복적으로 나타나 더 큰 실패를 낳는다”며 “창조적 기업은 실패를 독려하며, 실패로부터 배운 구체적 전략을 실천하는 ‘실패 정복자’”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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