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바닥 찍었다” 언론선 떠들지만… 대부분은 가계부 적자 탈피 안간힘
돈 아끼려 반값세일-공짜 술 찾고… 생필품 사려는 급전대출 70% 급증
최근 옆 사무실 헤지펀드 매니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줬다. 런던 5성급 호텔 아침 식당에 가서 “혹시 여기 미국의 J은행 나오셨어요? A투자은행은요? B펀드도 오셨나요?”라고 마치 출석부 부르듯 하면 여기저기서 손들고 인사한다는 것이다. 돈 냄새를 좇는 글로벌 자금이 모이는 사랑방이 된 듯한 유럽의 요즘 위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실제로 60년 만에 최악이었다는 올해 영국의 여름 무더위와 달리 신문 경제란은 속 시원한 기록적인 수치로 가득했다. 이탈리아처럼 투자가들을 우울하게 했던 국가들에 대해서도 ‘경기가 바닥을 찍었다’ ‘이제 좋아질 일만 남았다’ 같은 분석가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실제로 영국 신문 경제면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자주 보인다. ‘영국, 3분기에만 1% 성장 예상으로 놀랄 만한 수치’ ‘경기동향지수 1998년 이후 최고’ ‘소비자신뢰지수 1982년 이후 최고’ ‘부동산 향후 10년간 호황 예상’.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최근 고무적인 발표를 했다. “올해 상반기 주요 선진국 경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고, 이 기조는 하반기에도 지속될 것이다. 북미, 일본, 영국이 경기 팽창을 주도할 것이며 유로존은 이제 더이상 침체의 늪에 빠져 있지 않다.”
그동안 미국 증시에 쏠렸던 글로벌 투자자금이 장기간 소외되었던 유럽 시장으로 옮겨가는 양상도 보이고 있다. 올봄 유럽 경제지들이 ‘유럽, 트리플 딥(경기가 일시적으로 회복됐다 곧바로 침체되는 현상이 짧은 기간에 세 번 반복되는 것)에 빠질 우려’라는 헤드라인을 자주 뽑아낸 것을 기억하면 큰 변화이다.
하지만 장밋빛 수치가 신문을 도배해도 서민들의 체감지표(리얼 필)는 그리 밝지 않다. 한 푼이라도 싼 걸 찾고, 조금이라도 아끼지 않으면 가계부 흑자 내기가 쉽지 않다. 동네 슈퍼마켓에서는 ‘Three for Two(2개 값에 세 개 주기)’, 회사 근처 선술집 입간판엔 ‘One Two Free(맥주 한 잔 사고 두 번째 잔 주문하면 세 번째 잔은 공짜라는 뜻)’이라고 쓰인 큼지막한 글자가 퇴근길 직장인을 유혹한다.
‘웡가(Wonga)’라는 개인 단기 대출기관의 실적 발표를 보자. 연 이자율이 5853%에 이르고 대출한도는 1000파운드(약 170만 원), 대출기간은 30일 제한의 조건으로 영업한다. 그럼에도 작년에 대출건수가 70% 늘어 총 3800만 건 대출에 대출액 12억 파운드(약 2조 원)를 기록했다. 수익도 기하급수적으로 신장해 작년에만 8500만 파운드(약 1400억 원)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생필품을 사기 위해 급전을 찾는 서민이 많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단돈 1파운드로 결혼식을 치른 스코틀랜드의 어느 부부 이야기도 화제다. 신부의 어머니는 결혼식 사회를, 삼촌은 케이크와 사진촬영을, 신랑의 아버지는 색소폰 연주를 맡았다. 신랑은 입던 양복을 손질해서 입었다. 신부는 야생화로 부케를 만들고, 주변의 흔한 사슴 뼈로 반지를 디자인했다. 하객들은 음식과 포도주를 챙겨들고 와 축하해 주었다. 신부가 인터넷에서 재활용 웨딩드레스를 1파운드에 구입한 것이 결혼식 비용의 전부였다. 행복해 보이는 이 부부의 결혼식 사진이 실린 조간지를 보는 출근길 영국 시민들의 표정은 이를 단순한 로망으로만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다.
런던 금융 중심지 ‘시티 오브 런던’에서 근무하며 수입 측면에서 전통 귀족계급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가 구조조정된 투자은행 직원들은 아직 다 돌아오지 못했다. 금융가에 뿌려졌던 이들의 급여, 보너스도 예전 같지 않다. 어찌 보면 경제가 침체에서 회복되며 종종 발생하는 빈부의 격차가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경제 거시지표가 일반 시민들의 호주머니 사정으로 옮겨가는 데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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