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재벌家의 제왕학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28일 03시 00분


총수는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나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삼성, 현대, LG가의 가족사진. 첫 번째 사진은 젊은 시절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왼쪽)와 10세 때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주로 부모와 떨어져 초등학교를 다닌 이 회장은 이 시기에 잠깐 함께 지냈으나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두 번째는 현대가의 정주영 창업주(왼쪽)가 1984년 5월 차남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가운데), 6남 정몽준 의원과 마북리연수원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 오른쪽 허리를 숙인 이는 정 창업주의 부인인 고 변중석 여사다. 세 번째는 지난해 미수연에서 축하 떡을 자르는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과 가족들. 앞줄 왼쪽부터 구본무 LG그룹 회장 부부, 구 명예회장, 구 회장의 장녀인 연경 씨 부부,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의 딸 연제 씨. 뒷줄 왼쪽부터 구본준 부회장 부부, 구광모 LG전자 부장,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부부,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 부부. 동아일보DB
삼성그룹을 창업한 고(故) 이병철 회장은 철저하고 빈틈이 없는 성격이었다. 고집도 대단했다. 자녀들과 겸상을 쉽게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유교적 가풍을 따랐다. 하지만 한 가지에서만큼은 아들 앞에서 어려움을 털어놓을 정도로 고민이 많았다. 사람 보는 일이다.

그는 한때 삼성 경영에 참여했던 맏아들 이맹희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업의 성패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는데,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반반의 확률밖에는 자신이 없구나.”

면접에서 자기가 고른 사람이 나중에 보니 실망을 안겨줄 때면 크게 낙담했다. “사장학(學)은 인간학”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자신이 세운 회사를 이어받을 자식들에게 ‘인재를 알아보고 쓰는 법’만은 꼭 물려주려 했다.

이 창업주의 셋째 아들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평생 ‘사람’이라는 화두를 놓지 않았다. “나 자신 삼성의 회장으로서 제일 힘든 일이 사람을 키우고 쓰고 평가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중국의 제왕학(帝王學)은 사람을 뽑아 쓰는 일을 황제의 자질 가운데 으뜸으로 꼽았다. 맹자는 “군주가 천하를 도모하려면 불소지신(不召之臣)을 얻으라”고 했다. 임금도 함부로 오라 가라 하지 못할 만큼 소신과 판단력을 가진 신하를 말한다.

이 창업주는 역사를 통틀어 조직의 리더에게 고스란히 적용되는 경영의 원리를 자식에게 물려주려 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물려주고 싶어 한다. 어려서부터 경영자 교육을 받는 대기업 가문의 자녀들은 선대(先代)로부터 무엇을 배워 왔을까.

삼성, 현대, LG, SK 같은 대기업 가문이 자녀들을 리더로 키우는 법, 이른바 ‘총수 가문의 제왕학’을 취재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월 이건희 회장 취임 25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 중구 순화동 호암아트홀에서 부친의 대형 사진 앞을 지나고 있다. 동아일보DB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월 이건희 회장 취임 25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 중구 순화동 호암아트홀에서 부친의 대형 사진 앞을 지나고 있다. 동아일보DB
▼ 삼성家 “상대 경청하고 내 말은 아껴라” 카리스마 전수 ▼

#1. “지도자는 좋은 평판만 받으려 해선 안 된다.”(이건희 회장) “나쁜 사람들로부터 방어를 위해 군주는 스스로 좋지 않은 사람이 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마키아벨리, 군주론) “부하들보다 입을 먼저 열지 말라. 그들이 먼저 입을 열어야 진짜 의도를 알 수 있다.”(한비자·韓非子)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극 중 성진그룹 회장인 최동성(박근형 분)은 딸 서윤(이요원 분)에게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주며 이렇게 충고한다. “남들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지 말고, 남들이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거라.”

큰 조직의 리더가 돼 사람들을 가려서 뽑고 움직이게 하려면 일반적인 개인과는 다른, 리더의 덕목을 좇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카리스마적 리더였던 정주영 현대 창업주는 “(시도를) 해보기나 했어?”라는 질문으로 부하들을 꼼짝 못하게 했다. 스스로 현장을 누비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신화를 쌓아 왔기에 누구도 이 질문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꼭 해내겠습니다”라고 답하고 현장으로 뛰어나갈 수밖에.

정 창업주는 자녀 교육에서도 ‘나를 보고 따르라’는 식이었다. 자녀들과 겸상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이병철 창업주와 달리 그는 매일 오전 5시 자식들을 불러 모아 함께 식사를 했다. 지각하는 자녀는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밥상머리 교육으로 자기관리와 성실, 겸양, 예절을 가르친 것이다.

이를 물려받은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주말마다 자녀들과 아침식사를 한다. 현장을 샅샅이 누비면서 꼼꼼히 챙기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자녀에게 현장경영론을 물려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삼성가(家)에서 전해 내려오는 경청(傾聽)과 목계(木鷄)의 교훈도 널리 알려진 용인술이다.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진심과 의도를 끄집어내야만(경청) 상대방을 설득해 움직일 수 있다. 어떠한 싸움닭이 덤벼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 닭(목계)의 초연함과 의연함은 리더의 권위를 만들어낸다.

이건희 회장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부하 직원들의 보고를 받고도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반응할 뿐이다. 기나긴 침묵 뒤 한마디 말의 힘을 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세계 초일류를 지향해라”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은 이렇게 힘을 얻었다.

프랑스 절대왕정을 만들어낸 타고난 정치가 루이 14세도 침묵의 힘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장관과 귀족들이 논쟁을 벌이다 의견을 물으면 “잘 생각해 보겠다”고 할 뿐이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스스로를 무장해제한 신하들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2011년 열린 ‘아산 정주영 10주기 추모 사진전’에 참석해 부친의 다양한 생전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동아일보DB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2011년 열린 ‘아산 정주영 10주기 추모 사진전’에 참석해 부친의 다양한 생전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동아일보DB

#2. “믿지 않으면 사람은 떠나고 만다.”(이병철) “처음에 얻지 못한 신용은 나중에도 얻기 힘들다.”(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집을 팔아서라도 약속은 지켜라.”(이원만 코오롱 창업주)

여러 대기업 가문이 대대로 강조하는 화두는 신뢰다. LG가도 “한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는 구인회 창업주의 말을 용인술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는다.

구 창업주의 손자인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5월 대통령 순방 경제사절단 활동을 마친 뒤 미국 워싱턴의 현지 숙소에 머물지 않고 바로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지체했다가는 1월 한 행사장에서 만나 약속한 대학원생 7명과의 저녁식사를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용을 쌓는 데는 평생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지킨 것이다.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는 자신이 인수한 기업의 사장이 빚더미에 올라앉자 그를 위해 집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남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 리더는 결국 배신당한다. 한 그룹의 오너 회장은 자기에게 보고서를 올리는 사장들을 항상 의심했다. 눈앞에서 보고서를 찢으며 “지금 당신의 생각대로 결정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냐”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평생을 그룹에 바친 경영진을 아무런 사전통보 없이 물러나게 하는 일도 잦았다. 몇 년 뒤 그는 검찰 수사를 받고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재계에서는 “내부 핵심 인물의 제보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을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중견기업 J사의 C 회장은 남들 앞에서 종종 부하 직원들을 흉봤다. 당사자가 있건 없건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C 회장 역시 세월이 흐른 뒤 전 임원들과 고소, 맞고소를 벌이며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했다. 한 대기업의 고위 임원은 “개발독재 시대에 그룹을 살리려 부정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던 몇몇 총수는 자기 아랫사람도 믿지 못했다”며 “일부 기업인이 자식이 아니고선 곳간 열쇠를 맡기지 않으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왕학의 교과서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물(조직원)은 배(리더)를 띄우지만, 배를 뒤집기도 한다’고 경고한다.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는 리더들은 자신만의 각별한 경영철학을 만들어 실천한다. 대성그룹 창업주 김수근 회장의 손자인 김요한 툰부리닷컴 대표(서울도시가스 기획조정실장)는 종종 부친인 김영민 서울도시가스 회장으로부터 색다른 테스트를 받는다. 회사 임직원 전부의 이름과 인적사항을 다 외우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김 대표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버지는 신앙에 기반을 둔 경영철학을 강조한다”며 “수백 명이든, 수천 명이든 함께 일하는 직원이 누구인지 알고,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내 배려해야 비로소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3.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공경함으로 몸을 닦아라.”(LG가의 가훈 10계) “기업가의 자식이라도 남의 밥을 먹어봐야 한다.”(박두병 두산 초대 회장) “풍년 곡식은 모자라도 흉년 곡식은 남는다.”(이재준 대림 창업주) “부귀한 곳에서 태어나 민간의 고통을 모르는 군주는 일족이 몰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당 태종, 정관정요)

그룹 총수들은 자신이 쌓은 큰 부(富)가 자녀에게 남다른 기회를 주지만 동시에 그들의 미래를 망치는 독(毒)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더 신경 써 교육을 시킨다.  
▼ 두산 박두병 “남의 밥 먹어봐야” 아들들 다른 회사 보내 ▼

박두병 초대회장은 자녀들을 남의 회사에 보내 노동의 중요성을 배우도록 했다. 그 자신도 조선은행에서 일한 경험이 있고, 자녀인 박용곤 명예회장, 고 박용오 회장, 박용성 회장, 박용만 회장 모두 은행에서 근무했다. 우애와 인화를 가르치려 매를 드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정신은 지금의 형제경영과 ‘사람이 미래다’라는 경영 철학으로 이어졌다.

총수들은 돈 버는 법보다 쓰는 법을 정성스레 가르쳤다. 정주영 창업주는 자녀나 손자, 손녀를 자가용 승용차에 태워주는 일에 인색했다. 젊었을 때 콩나물 버스에서 시달려봐야 내 힘으로 자가용을 타게 됐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논리였다.

구인회 LG 창업주는 물건을 사면 반드시 사용기한을 정해 그때까지 아껴 쓰도록 했다. 작은 돈이라도 함부로 쓰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자녀에게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돈을 낭비하고 천하게 쓰는 것은 악덕 중 하나”라고 늘 강조했다.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주는 은퇴해 가축을 기르던 시절 아들과 며느리는 물론이고 손자들이 양계장에 와 달걀을 가져갈 때에도 달걀값을 받았다. 모든 노동에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생각이었다.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는 아들(김석원 전 회장)을 미국에 유학 보낸 뒤 생활비를 부치면서도 사용명세서를 요구했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2010년 아들 김남호 동부제철 부장이 부인과 함께 일본에서 유학하던 때 생활비를 한 달에 400만 원 부쳐줬다. 월세 200만 원을 뺀 나머지 200만 원으로 부부가 한 달 동안 살라는 뜻이었다.

총수들은 자녀에게 이토록 인색하게 굴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최종건 SK 창업주의 아들인 최신원 SKC 회장은 아들 성환 씨와 편지로 대화한다. 한번은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성환아 이게 다 네 돈이 아니야. 네가 잘나서 갖게 된 게 아니라고. 그러니 항상 머리를 숙여라. 항상 겸손해라. 남들과 어울릴 줄 알아야 하고,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 입사 평균 28세, 임원승진 31.8세 ▼
■ 재계 2∼4세 55명 프로필 분석

주요 그룹 2∼4세 자제들의 출신 학교와 입사 후 첫 직책, 현 직책을 분석해 보면 과거와 다른 여러 변화가 눈에 띈다. 예전에는 국내에서 학부를 마친 뒤 해외 유학을 가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2∼4세 55명의 학력 및 경력을 분석한 결과 1973년 이후 출생(40세 이하)은 고등학교 졸업 후 곧장 유학길에 오르는 추세가 두드러졌다.

이들의 대학교 학부 전공은 경영학, 인문학, 자연과학 등으로 다양한 편이었지만 석박사 과정은 해외 명문대 경영대학원(MBA)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공부를 모두 마친 뒤 그룹 계열사에 입사하고 난 뒤의 삶은 어떨까. 2010년 한 조사에 따르면 현직 임원으로 재직 중인 대기업 총수 자녀들의 당시 평균 나이는 31.8세에 불과했다. 평균 28세에 입사한 것을 감안하면 3.8년 만에 임원으로 승진한 셈이다. 아예 임원으로 입사한 케이스도 많다.

최근에는 외국계 투자회사나 금융회사, 컨설팅 회사를 거치며 ‘스펙’을 쌓은 뒤 임원을 달기 직전 부장급으로 경력 입사하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 LG 구인회, 장남 부르더니 공장 지키는 일부터 맡겨 ▼

■ 다양한 경영수업 노하우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왼쪽)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인 1999년 아들인 구본무 회장과 강원도의 한 농장에서 밝은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DB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왼쪽)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인 1999년 아들인 구본무 회장과 강원도의 한 농장에서 밝은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DB
경영 수업 핵심 과목은 ‘사람 관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받은 경영 수업은 사람과의 관계 맺기가 핵심 중 하나였다. 이건희 회장은 아들에게 철저하게 경영자로서의 인맥을 다지도록 했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에 적을 둔 채 일본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대, 와세다대가 아닌 게이오대를 택한 까닭은 일본 재계와의 네트워크 구축에 있었다. 일본 재계엔 게이오대 출신이 많았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박사과정을 밟는다. 이건희 회장의 부탁을 받은 잭 웰치 GE 회장의 배려로 세계 최고의 인재 사관학교라는 크로턴빌에서 연수도 받았다.

이 부회장은 2001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네트워크를 다졌다. 그룹 안으로는 식사를 하거나 골프를 치며 대부분의 임원과 얼굴을 익혔다. 밖으로는 세계 경영계 주요 인사들과 관계를 맺었다. 삼성그룹 비서실장을 거쳐 당시 삼성물산 회장으로 재직했던 현명관 창조와혁신 대표의 회고다. “1년에 한 번 일본 은행장이나 재계 인사들을 방문할 때면 당시 이 상무가 반드시 동행했어요. 그가 관련 업무를 맡은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조용히 듣기만 했죠. 중요한 경영 파트너와 안면을 익히는 경영 수업을 받았던 겁니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에 엮이는 총수 자녀들은 만나면 이로운 사람과 해로운 사람을 가리는 법도 자연스럽게 배운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손자로,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의 아들인 정경선 씨는 최근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항상 사람을 겸손하게 대하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을 경계하라는 가르침도 받았죠. 결국 중도(中道)를 지키는 사람을 가까이하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는 아들 조석래 회장에게 다음과 같이 ‘사람 가리는 법’을 가르쳤다. 첫째 반골유무(叛骨有無·배신할 사람을 주의할 것), 둘째 지론출중(持論出衆·탁월한 지식을 가진 인재를 만날 것), 셋째 진정가장(眞正家長·가정을 잘 보살피는 사람을 가까이할 것)이다.

대를 이어 토론 수업하는 집안

아버지와 자녀들이 유럽을 여행하고 있었다. 낮에 관광지를 돌 때는 평범한 가족여행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저녁이 돼 식탁에 앉아 나누는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이 나라 국민의 소비문화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경제는 어느 정도 수준이며, 정치 환경은 안정적인가…. 여행길에서 심각한 토론을 벌인 이들은 최태원 SK㈜ 회장과 그의 자녀들이었다.

토론은 최 회장의 부친인 최종현 회장 때부터 내려오는 집안 전통이다. 최 회장과 두 아들 태원, 재원의 토론은 오후 7시쯤 시작해 3시간 넘게 계속될 때가 많았다. 한번은 ‘디지털이 무엇이냐’는 주제가 나왔다. “디지털이 왜 (아날로그보다) 더 좋은 것인지 설명해 봐라.”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지면 두 아들은 열심히 답해야 했다.

최종현 회장은 한 번도 답을 알려 주지는 않았다. 나중에 경영에 참여한 두 아들이 고민을 상의할 때도 얘기를 듣고 나서는 “그건 네 문제구나. 그걸 왜 나한테 가져오느냐”고 말하곤 했다.

총수 일가 자녀들도 스펙 시대

구인회 LG 창업주의 장남인 구자경 명예회장은 진주사범학교를 나와 교편을 잡았지만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가업(家業)에 동참했다. 폼 나는 일을 한 게 아니다. 부산 범일동 플라스틱 공장을 밤낮으로 지키고 관리하는 업무였다. 공장에서 군용 슬리핑백 하나로 새우잠을 자다 오전 5시면 일어나 상인들에게 물건을 내주는 일을 몇 년 동안 했다. 기업 현장, 특히 제조업의 핵심인 공장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구 창업주는 구 명예회장을 불러 경영권을 물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장남이니까. 선생질 그만두고 공장에 와서 고생할 때 너 아버지를 원망했제?”

“…….”

“그래서 안 배웠나. 공장 어느 구석엔 무엇이 있고 어데 가면 누가 일하고…. 이젠 너도 박사제. 공장에 대해선?”

“웬만한 건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게 밑천이다. 너만치 아는 사람도 그리 없다. 자신을 갖고 일해라.”

구 명예회장의 아들 구본무 회장도 ‘사업 현장 경험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다. 현장 경험으로 사람과 사업을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의 아들 구광모 LG전자 부장은 2006년 LG전자에 입사한 뒤 재무, 상품 개발, 글로벌 사업 업무를 두루 익히고 있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두 아들을 원양어선에 태운 것도 밑바닥에서부터 배우라는 의도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현장보다는 회사 밖 외국계 기업이나 컨설팅 업체에서 경력을 쌓은 뒤 ‘화려한 스펙’을 앞세워 그룹에 들어오는 2, 3세가 많다. 아무리 2, 3세라고 해도 경영자로 입지를 다지려면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덩치가 커져 성장이 정체된 그룹 내에선 현장을 누빈다고 해도 능력을 보여 주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렇다 보니 스펙에 매달리게 된다는 거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일부 총수 자제들은 그룹 내에서 경영 수업을 받을 때 중요한 직책이나 특정 사업을 맡기를 꺼리기도 한다”며 “자칫 사업에서 실패하면 경영 능력에 흠집이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평판 관리

A그룹의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의 자제인 B 군은 대원외국어고에 입학한 뒤 10개월 만에 자퇴하고 미국 사립고로 유학을 떠났다. “어차피 유학할 텐데 왜 힘들게 외고 입시를 준비했느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중학교 마치고 곧장 유학 가면 공부 못해 도피 유학 간 것처럼 보이잖아. 명문 외고를 거쳐 유학 가는 게 평판상 좋겠다는 부모님의 권유로 입시를 준비했어.”

총수 일가라도 후손이 늘어나면서 학력과 스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과거 경기고, 경복고 등 서울 명문고에 몰렸던 총수 일가 자녀들이 고교 평준화 이후 외국어고 등에서 새로운 학맥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국어 공부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외고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예비 신랑 신부감으로서의 가치를 높여 준다. 한 결혼정보업체 관계자는 “해외 유학은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 않아도 돈이 많으면 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다 보니 국내 명문 학교 합격 기록이 결혼에 메리트가 된다”며 “머리가 좋고 성실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져 부잣집 자녀들 사이에서도 차별화가 된다”고 설명했다.

자녀의 스펙을 만들어 주기 위해 사(私)교육의 힘도 빌린다. 주로 서울 강남 대치동의 유명 학원 강사들을 집으로 불러 야간에 교육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C그룹의 3세 D 씨는 언어·수리·외국어 영역별로 ‘1타 강사’(학원가 최고 인기 강사)를 섭외해 특별 과외를 받곤 했다.

여러 재계 2, 3세 모임에 참석한다는 김요한 서울도시가스 실장은 “경영에 참여한 2, 3세들은 처음엔 스펙 경쟁을 벌이고 사업에 관여하면서는 조직관리 능력 경쟁을 벌인다. 그 다음은 실적 경쟁을 벌여야 한다”고 했다. “제가 아는 2, 3세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암투만 벌이지는 않습니다. 인정받고 살아남으려 부단히 고민하고 노력하죠. 세상의 시선이 곱지 않은 건 이해합니다. 남들보다 좋은 조건을 갖췄으니까요. 하지만 단순히 돈이 많다고 손가락질하는 건 옳지 않아요. 그걸 운영할 능력이 없다면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능력이 있으면 인정해 줘야죠.”

어떤 삶을 물려줘야 하나

자식에게 어떤 삶을 물려줄지 부모는 고민한다. 총수 일가의 경영권 물려주기가 문제가 되면서 ‘경영 능력은 세습되는가’라는 논쟁이 인 적이 있다. “경영 능력은 유전되지 않으므로 뛰어난 기업가의 자녀라고 해서 뛰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의견과 “경영자의 자질을 어려서부터 직접 길러 주는 부모와 그 집안의 가풍이 ‘경영 DNA’로 전수되는 것”이라는 의견이 맞섰다.

미국의 억만장자 워런 버핏의 아들 피터 버핏은 ‘위대한 유산’이라는 책에서 “자식을 도와주는 것과 그 자식을 통해 아버지의 꿈을 영속시키는 것은 다르다”며 자신에게 큰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기업인의 길을 강요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을 표시했다.

전성철 IGM세계경영연구원 회장은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마쓰시타전기 창업주의 견해를 전하며 이렇게 조언했다. “경영자는 사람을 다루는 능력과 우주의 섭리를 깨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기업 총수들은 자녀에게 기업의 지분만 물려주는 게 아니라 기업의 존재 목적과 운영 철학, 기업가로서 가져야 할 가치관과 삶의 목표를 물려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녀들이 직접 경영에 나서도 고통스러운 기업가의 길을 견뎌 내지 못할 것입니다.”

김용석·김지현 기자 nex@donga.com




#재벌가#재벌 경영#총수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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