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성장기 부의 상징이던 주거용 아파트. 몇 해 전부터 ‘아파트 불패 신화’가 깨지면서 이젠 아파트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다. ‘주간동아’는 30~50대 직장인과 주부의 좌담회를 통해 아파트에 대한 인식을 추적했다. “그래도 아파트”라는 50대 기업체 대표와 “목돈을 왜 깔고 앉느냐”는 30대 직장인의 논쟁만큼 아파트에 대한 인식도 세대별로 확연히 차이가 났다.
좌담회는 9월 10일 서울 논현동과 도화동에서 50대 기업체 대표 임정철(54) 씨와 40대 중소기업 부장 백승수(45) 씨, 40대 주부 나서연(44) 씨, 30대 직장인 최혁민(36) 씨가 참석한 가운데 두 차례 진행됐다. 다만 이들은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해 사진은 찍지 않았다. 왜 목돈 깔고 앉아 있나
▼ 아파트에 대한 인식은 바뀌었나.
임 : 고도성장기 대도시 인구 집중으로 주거용 고밀도 건축양식은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도 1964년 서울 도화동 마포아파트를 시작으로 경제개발과 함께 아파트가 우후죽순 격으로 들어서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고도성장기도 아니고 인구 증가도 둔화 추세다. 특히 서울의 아파트 불패 신화는 이미 깨졌다. 부동산에 투자해 재미 보는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아파트에 대한 인식도 소유 개념에서 주거 개념으로 바뀌는 것 같다. 특히 7080세대, 즉 1980년 학번이 50대가 되면서 그 변화가 빨라지는 듯하다.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절반 정도는 며느리를 봐야 할 시점에 사돈댁에 보여주려고 아파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머지는 굳이 아파트에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나 : 사는(Buying)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는(Living) 게 중요하다. 윗세대를 보면 열심히 벌어서 아파트 평수 넓혀가는 게 재테크고 재미였다면, 지금은 오히려 평수 줄이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작은 평수에 산다면 오히려 “어떻게 갈아탔느냐”며 부러워하는 시대다. 각 가정에 자녀도 보통 1~2명뿐이고, 그마저도 입대나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면 부부 둘이 산다. 그러니 큰 평수보다 작은 평수로 옮겨 타고, 그 돈으로 취직 못 한 자식에게 치킨집이나 차려주려고 한다.
백 : 아파트가 부의 상징이란 생각은 일부 남아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집값이 오를 때 무리하게 샀고, 그게 통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니다. 부부 동반으로 엄마들 모임에 가보면 여전히 강남, 분당, 판교 아파트 얘기를 한다. 큰 평수 아파트를 사서 수천만 원 들여 인테리어를 했다고 자랑하는 엄마도 정작 모임에서 2만~3만 원 하는 치킨값을 못 낸다.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냥 ‘인생 왜 저렇게 사나’ 싶다.
최 : 우리 같은 ‘유리지갑’에게 들어오는 돈은 빤하다. 3억 원짜리 아파트를 샀다고 치자. 금리가 바닥이라 해도 은행은 3%, 저축은행은 4%, 적립식 펀드는 5% 이상 수익을 낼 수 있다. (아파트에) 깔고 앉은 돈 3억 원을 투자하면 1년에 최소 1500만 원이 생긴다. 나는 아파트 구매 대신 그 돈으로 금융상품에 예치해 수익을 거두고, 그 수익으로 주말에 아이들과 캠핑을 간다. 캠핑 장비도 사고 사교육도 시킨다. 기회비용이 생기는 거다. 그런데 왜 아파트에 목돈을 깔고 앉나. 예전에는 ‘아파트에는 살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파트에 사는 게 부의 상징인 시대는 지났다. 전셋값 인상 스트레스
백 : 하긴, 요즘 전세 산다고 눈치 보는 사람은 없다. 내 경우 2년 동안 집주인 한 번 본 적도 없다. 오히려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눈치를 준다. 이사할 때 등기부등본을 떼보면 대출 명세가 나오지 않나. 집을 담보로 얼마 대출을 받았는지 다 나오고, 집주인이 ‘알짜’인지 ‘개털’인지도 금방 안다. 세입자가 입주 전 빚을 갚으라고 한다.
최 : 그렇다. 나도 2년에 한 번 대청소(이사)한다고 생각한다. 전세 살면 기회비용으로 1년에 1500만 원 버는데 300만 원 들여 이사하는 게 대수인가. 현재 거주하는 아파트로 이사할 때 집주인에게 “여기서 오래 살 수 있나요?”라고 물으니 “그럼요. 제발 오래 사세요”라고 대답하더라. 이유를 물었더니 “우린 여기 살 돈이 없어 변두리에 산다”고 했다. 대출받아 내 집은 샀지만, 대출금 상환 때문에 전세를 주고 자신은 집값이 싼 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주인이었다.
▼ 집값 하락과 아파트 매매 상관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임 : 우리 같은 50대는 아파트 담보대출금을 꾸역꾸역 상환했고 이제 거의 다 갚은 상태다. 그런데 돌아보면 아파트 한 채 덩그러니 남았다. 아파트 한 채 사려고 그렇게 허리띠 졸라맸나 싶어 허무하기도 하다. 거주 개념으로 아파트를 장만했기 때문에 집값이 조금 떨어져도 신경 쓰지 않는다.
최 : 경기 용인에 3억 원대 초반 아파트를 산 친구는 집값이 2억5000만 원으로 떨어진다고 걱정인데 우리 같은 세입자는 맘 편하다. 전셋값은 2년 뒤 고스란히 되돌려 받는다. 그리고 30대는 인터넷에 익숙해 부동산보다는 주식 같은 금융상품 투자를 더 좋아한다. 나도 1년에 한두 번 자산을 엑셀파일로 정리해 연초 때와 비교해보는데, 현재는 전체 자산 가운데 부동산 전세 비중이 자산의 50%를 넘는다. 난 부동산 비중을 30%대로 낮추려고 한다.
나 : 주부들은 교육 때문에 아파트를 사거나 이사 가자고 한다. 괜찮은 아파트로 이사 가면 주부들은 최신 사교육 트렌드와 입시 정보를 쉽게 알 수 있다. 집안 좋은 또래를 만나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나도 그랬지만, 한 구좌에 100만 원짜리 곗돈을 남편 몰래 2~3개 들어놓는다. 그 돈으로 아이 과외교습도 시킨다. 물론 남편이 알면 불호령이 떨어지지만, 남편에게는 20만 원짜리 학원에 보낸다 하고 곗돈 타서 500만 원짜리 과외를 시켰다. 괜찮은 아파트에 살면 그런 정보는 많다. 그런데 요즘은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도 쉬워지고 심야 과외도 단속하고 있어 그런 현상이 많이 약해진 건 사실이다.
백 : 공감한다. 주변을 봐도 교육비와 전셋값 인상 스트레스로 아파트를 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인데, 아내는 교육 때문에 신반포나 강남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한다. 나는 반대다. 지금도 영어, 수학, 논술, 음악 등 사교육비가 장난이 아닌데 이사 가면 집값에 이자비용까지…. 친구들 사례를 봐도 아내 목소리가 큰 집은 강남이나 목동 아파트로 이사 간다. 수입은 빤한데 빚을 내서 아파트로 이사하는 건 허영이고 대리만족 아닌가. 그래도 한국에서의 엄연한 현실이라 고민이다.
▼ 아파트 전셋값 상승으로 세입자는 고민이다. 정부는 매매 활성화를 위해 주택구입자금 사용을 권장하며 집을 사라고 한다. 전셋값이 어느 정도 오르면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하나.
최 : 나는 기회비용을 따져봤을 때 아파트 전셋값이 집값의 80% 수준까지는 전세를 살 거다. 지금 내가 거주하는 경기 용인 지역 아파트값은 3억 원대 초반이다. 그러니 2억4000만 원까지는 전셋값을 낼 용의가 있다. 요즘 들어보니 1억6000만 원이던 전세 아파트가 4000만 원 정도 올랐다고 한다. 만약 집값의 80% 이상 올려달라고 하면 기회비용과 비슷해져 살 수도 있다고 본다.
백 : 우리 같은 40대는 아이 교육 때문에 자주 이사 가는 걸 꺼린다. 그래서 전셋값 올려달라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전셋값 스트레스 때문에 아파트를 산 친구도 여럿 있다. 그런데 실직하면 아파트 구매 대출금을 감당할 수 없어 고민하는 친구도 있다. 하우스 푸어가 40대에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최 : 집은 꼭 아파트만 사야 하나. 나는 굳이 산다면 교외에 나가더라도 마당 있는 집을 사고 싶다. 요즘 30대는 캠핑 장비를 실으려고 트레일러와 SUV(스포츠 유틸리티 차량)를 산다. 트레일러를 아파트에 세워둘 수는 없지 않나. 차고와 마당이 있는 집으로 가야 한다. 예전 우리 어머니들은 “애들 다 키우고 전원주택으로 이사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지금 30대 여성은 대부분 운전을 한다. 교외에 살더라도 외국처럼 엄마가 ‘픽업’하면 된다. 외국 아이들이 스쿨버스를 타듯. 그 대신 자연에서 인성을 키우고 아이 생일 때 마당에서 파티를 하는 기쁨은 아파트에 살면 느낄 수 없다. 그리고 경기도 교외에 있는 학교들도 예전과 달리 학습 환경이 많이 개선됐다. 오히려 경쟁이 심하고 학생 수가 많은 서울 8학군보다 낫다. 주택 매입이 이익 시그널 나와야
임 : 50대에게 고민은 노후다. 아파트를 꼭 사야 한다는 것보다 열심히 벌어 아파트 한 채를 마련했으니 그거라도 적극 활용하려고 한다. 큰 평수의 아파트를 줄여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고, 그 돈으로 노후에 대비하는 거다. 1억~2억 원 마련해 경기 중소도시에 원룸을 짓는 친구도 있고,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열어 노후 준비를 하는 식이다.
나 : 40대도 비슷하다. 요즘은 아파트값 하락으로 ‘아파트를 왜 샀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적극 활용할 필요는 있다. 한창 돈이 나가는 시기이고 또 아파트를 살 때 빌린 대출금도 갚아야 한다. 그러려면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아 상가에 투자하거나, 이자가 싼 전세자금을 대출받아 다른 투자처에 넣어두기도 한다. 물론 불법이지만….”
▼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임 : 정부 부동산 정책의 약발이 안 먹히는 건 1000조 원이 넘는 가계 부채 때문이라고 본다. 가계가 돈이 있어야 소비도 되는데, 지금은 다들 빚에 허덕인다. 풍선처럼 빵빵해져 터지려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정치권이다. 대통령 단임제를 채택하다 보니 어느 정권이든 부동산 기대심리를 부추긴다. 경제가 잘된다고 해야 표가 나오니까. 국민은 착각 속에서 부동산시장이 바닥을 쳤다고 생각한다. 요즘도 그렇다. 일본과 비교하면 우리는 막 터널에 진입했는데 정치권은 “터널을 벗어났다”고 말한다.
백 : 현재의 전세난은 집을 사야 할 사람이 주택을 매입하지 않기 때문 아닌가. 부동산 침체로 공공과 민간 모두 공급이 줄고, 집값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단기적으로 시장을 활성화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대출이자를 낮출 테니 주택을 매입하라는 발상은 가계 부채를 생각하면 위험하다. 주택을 매입하는 게 전세나 월세보다 이익이 된다는 시그널을 주는 정책이 나와야 한다. 사회 및 정리=배수강 기자 b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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