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건설업체인 T사는 지난해까지 회사 분위기가 좋았다. 건설경기가 침체됐지만 교량 구조물 분야에 축적한 기술력 덕분에 연간 700억 원가량의 안정된 매출을 유지했다.
특히 T사는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기 위해 2005년부터 시작한 하수처리장 신공법 개발을 2011년 완료해 수익창출 기대가 컸다. 신공법은 2005년 환경부가 공모한 국책연구과제에 선정된 기술이었다. 기술개발에는 정부 지원금 40억 원과 회사 자금 80억 원이 투입됐다. ‘○○○○○3’로 이름 붙여진 이 기술은 기존 공법에 비해 공사비와 유지관리비를 30% 줄여주는 등 장점이 많아 미국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등 7개국에서 특허를 받았다. 현재 경기 평택시 하수처리장 등 국내 세 곳에서 이 기술이 활용하고 있다.
올해 들어 사우디 진출을 준비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11월에 사우디의 하수처리시설을 담당하는 수전력부와 환경공사의 기술자들이 T사의 하수처리시설을 살피기 위해 방한할 예정이다. 사우디에서 수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 사우디는 인구증가율이 높은 데 비해 하수처리시설이 낡고 부족해 향후 200억 달러(약 21조 원) 규모의 하수처리시설 공사물량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시장이다.
신기술의 해외진출 기대가 한껏 부푼 요즘, 이 회사 경영진은 고민에 빠졌다. 자금난이 닥치면서 ‘공든 탑’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간 신기술 개발에 거액을 투입한 데다 사우디에서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사우디 당국이 건설근로자 자격 요건을 강화해 이 회사의 현지 레미콘공장 가동이 일시 중단되면서 자금난이 닥쳤다.
시중은행을 상대로 돈을 구하러 뛰어다녔지만 허사였다. 신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에 정책금융을 지원하는 산업은행에 기대를 걸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T사 대표는 “건설사에 정책금융을 해주는 명시적 규정이 없다는 게 거부 이유였다”고 말했다. 하수처리 관련 기술은 미래산업이지만 이 회사는 건설로 분류된다는 게 걸림돌이었다. 그는 “국가가 지원한 기술이 중동에 진출하도록 금융당국이 융통성을 발휘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T사는 기술경쟁력은 있는데 자금력이 부족한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전형적인 사례다. 대기업은 수익이 날 때까지 버틸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일시적 자금난에도 쓰러지기 쉽다.
정책금융에 대한 대출 규정과 관행은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일시적 자금난 때문에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중소기업이 어렵게 개발한 기술까지 사장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사각지대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창조금융이 아닐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