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그룹들이 내년 사업계획 수립에 본격 착수한 가운데 한껏 움츠렸던 설비투자가 활기를 띨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정기영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은 16일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내년 경영전략과 관련해 “참고 견디는 수동적 대응만으로는 저(低)성장을 극복할 수 없다”며 “‘건전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시기 그가 올해 경제를 전망하면서 ‘저성장 기조의 장기화에 대비하는 경영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문했던 것과 사뭇 다른 것이다. 그룹 관계자는 “선진국 시장의 회복 추세가 내년까지 이어질 것에 대비해 신규사업 투자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8월 박근혜 대통령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소프트웨어 인재 육성에 노력하고 기초과학을 육성하는 한편 융·복합 기술 개발에 노력하겠다”며 소프트웨어와 소재, 부품 분야의 투자를 시사한 바 있다.
정 사장은 내년 국내외 경제에 대해서는 “선진국 경기 개선으로 세계 경제성장률이 완만하게 상승하고 있다”면서도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로 금융이 불안하고, 국내에서도 민간 부문의 경제 회복력이 여전히 낮아 기반은 취약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그는 내년의 5대 경제현안으로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신흥국 성장 둔화 △한국의 재정 여력 약화와 민간부문의 더딘 회복 △국내 주택경기 부진 △기업 자금사정 악화에 따른 신용 경색 리스크를 꼽았다. 삼성 측은 구체적인 국내외 경제성장률 전망 등은 공개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그룹도 ‘실물경제의 완만한 회복 속 기회 포착’을 키워드로 삼아 새해 사업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완만한 경제성장 속에서 환율 문제 등 불안요소를 제거하고 경쟁기업보다 먼저 선진 시장의 점유율 확대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SK그룹은 오너 부재로 STX에너지 인수를 포기하는 등 성장 추진력이 약해졌지만 내년 키워드를 ‘안정’으로 정하고 내부 기반 다지기에 주력할 방침이다. 구본무 회장이 시장선도와 실행력을 강도 높게 주문하고 있는 LG그룹은 내년에도 공격적인 경영 기조를 유지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해 연말 인사와 조직 개편에서 선도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현대중공업은 ‘시장 정상화’, GS그룹은 ‘불확실성 속 성장전략’이 키워드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최근 “저성장세가 지속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근본적 체질개선을 해야 한다”며 “미래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전략적 투자를 적기에 실행하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주요 그룹들이 위기관리를 최우선으로 한 현 기조와 달리 불황 속 성장 모멘텀 찾기에 나선 것은 내년 국내외 경제 상황이 올해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LG그룹은 내년 국내 경제성장률을 3.6%로 내다봤다. 삼성과 SK그룹도 공히 내년 한국경제가 완만한 회복세를 보이며 3% 중반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측했다. 현대차그룹은 유일하게 2% 후반의 성장률을 예상해 가장 보수적이었다. 현대차그룹을 뺀 4대 그룹의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은 기획재정부(3.9%), 한국은행(3.8%)보다는 낮지만 국회 예산정책처의 전망 3.5%보다는 높은 수준이다.
주요 그룹은 경기회복을 주도하는 것은 여전히 내수보다는 수출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유럽 등의 경제가 2분기(4∼6월)부터 점차 회복세로 돌아섰고 내년에는 분위기가 더 좋아질 것이란 전망이다.
변수는 환율이다. SK그룹은 내년의 원-달러 평균 환율을 1085원, LG그룹은 1060원으로 예측해 올해보다 더 낮아질 것으로 봤다. 재계는 엔화 약세도 이어져 전자, 자동차 등의 부문에서 일본 업체와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관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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