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던 날, 소현세자와 훗날 효종으로 왕위에 오르는 봉림대군은 인질이 돼 청나라로 끌려갔다. 봉림대군은 청에 볼모로 10여 년을 잡혀 있는 동안 반드시 청나라에 설욕하고야 말겠다는 복수심을 불태운다. 복수를 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하고 적을 알아야 한다. 원래부터 무예와 군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청나라 군대를 따라가 그들의 전투를 참관하고 전술을 익혔다.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봉림대군인 효종이 즉위했을 때, 그는 꿈에 그리던 북벌을 추진했다. 조선의 허약한 군사력을 보강하기 위해 중앙군을 증강했고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심지어 궁궐 후원에도 훈련장을 만들고 자신이 직접 무사들과 말을 달리며 훈련을 했다. 지방에서도 제대로 된 훈련을 하도록 다그쳤다.
그 효과가 나타났다. 17세기 중반 청나라는 지금의 시베리아 지역에서 러시아와 국경 분쟁을 벌였다. 무력 충돌로 발전하자 조선에도 파병을 요청했다. 효종은 소수의 정예부대를 파견했는데 그동안 갈고 닦은 조선군의 실력을 가늠해 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두 번에 걸친 나선정벌은 효종에게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다 줬다. 그 무섭던 청나라 군대는 어느 새 타락하고 나태한 모습을 보였다. 조선군 지휘관의 판단력, 전술 능력이 오히려 뛰어났다. 실전에서도 조선군은 선봉부대로 활약했고 우수하고 침착한 전투 능력으로 승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나선정벌에서 조선군이 잘 싸운 이유는 병사들이 원래 정예병이었고 병력도 겨우 수백 명에 불과한 중대 규모였기 때문이었다. 연대 규모 이상의 군대가 능력을 발휘하려면 개인의 무용이 아니라 전술 능력이 필수적이다. 이 부분에서 조선군은 여전히 수준 이하였다. 취약한 전술 능력보다 더 큰 애로가 있었다. 효종은 10만 명의 정예군만 육성하면 청을 공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부실한 정예군도 2만∼3만 명이 한계였다. 그 이상은 군대를 운영할 재력도, 무사 자원도 없었다.
효종은 한창 북벌을 추진하다가 왕이 된 지 10년 만에 갑자기 사망했다. 많은 사람이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아쉬워하고, 혹은 암살이 아니냐고 의심하기까지 한다. 과연 효종이 좀 더 살았다면 북벌이 가능했을까. 그렇지 않다. 당시 조선은 전쟁 가능한 10만 군대를 양성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정예병의 전술 능력이 잘 개선되지 않았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북벌이라는 목적에 대한 공유와 신념이 부족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말하며 청나라를 멸시하는 풍조는 조선인 누구에게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성공하고 싶다는 막연한 감정의 공유이지 목적 의식의 공유가 아니었다. 목적 의식은 내용이 분명해야 하고 기대효과도 선명해야 한다. 그래야 장병 개개인이 분명하게 사명을 인지하고 훈련과 전술에도 최선을 다할 수 있다. 하지만 북벌의 명분이 좋더라도 정말 가능하겠는가라는 의구심이 사회에 가득했다. 북벌을 통해 모욕과 수치를 해소하겠다는 감정적인 요인 외에 내가,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얻는 실질적인 이익은 무엇일까. 리더는 그런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구성원 각각이 구체적인 비전을 가질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하지만 조선의 위정자들은 북벌론을 얘기할 때 “만주족도 했는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며 감정만 공유했을 뿐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정예병의 전술 능력이 오르지 않았던 두 번째 이유는 군사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조선의 오군영 병사들은 명목상 월급을 받는 직업군인이었지만 부대에 대한 사명감과 자부심이 부족했다. 월급도 적어 간신히 기초 생활비를 충당하는 수준이었다. 병사 자신과 가족이 부업을 해야 했다. 군인이 부업에 정신이 팔리면 훈련에도 소홀해지지만 군인으로서의 자세를 쉽게 상실한다. 군인으로서의 자세와 민간인으로서의 생활 방식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직업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의식, 자부심이 부족해진다. 이 때문에 제식, 사격 등은 훈련을 통해 성과를 올릴 수 있었지만 전술력과 같이 자발성과 창의성, 공동체적인 단합을 요구하는 훈련에선 성과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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