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디스카운트 스토어(할인점) E·MART, 신세계가 새로운 형태의 점포를 선보입니다.”
1993년 11월 12일 이마트 창동점(서울 도봉구 창동)은 전단에 이런 문구를 내걸었다. 점포는 기대 속에서 문을 열었지만 소비자들은 발길을 돌리기 일쑤였다. 외국의 할인점을 그대로 옮겨놓아 ‘볼품없는 창고’ 같았기 때문이다. 라면, 조미료, 커피를 만드는 주요 제조사들은 기존 대리점과의 계약이 끊어질까 우려해 납품을 거부했다. 매장에는 대부분 ‘2등 이하 업체’의 제품들밖에 없었다. 소비자들은 “원하는 물건이 없다”며 불평했다. 하지만 ‘물건이 싸다’는 입소문이 퍼지자 고객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첫해 450억 원에 그쳤던 이마트의 매출은 지난해에는 그 300배가 넘는 14조2000억 원으로 불어났다.
12일로 대형마트가 한국에 등장한 지 20주년이 된다. 1993년 이마트를 시작으로 1998년에는 마그넷(현 롯데마트)이, 1999년에는 테스코(현 홈플러스)가 영업을 시작했다.
유통업계는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한국 사회의 소비 지형이 크게 바뀌었다고 평가한다. 유통 단계 단순화와 물류 개선 등의 유통혁명으로 제품 판매 가격을 낮춘 것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과거 백화점이나 재래시장에서 여성을 중심으로만 이뤄지던 쇼핑이 가족 중심의 활동으로 바뀐 것도 큰 변화다.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도 상당하다. 한국체인스토어협회에 따르면 대형마트는 지난해 말 기준 전국 470곳에 점포를 보유하고 있으며 연 매출액은 32조9000억 원, 직접 고용 인원은 6만9000명에 이른다. 대형마트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는 유통 시장 개방도 한몫을 했다. 프랑스 까르푸(1996년)와 미국 월마트(1998년)가 대형마트 붐을 타고 잇달아 한국에 상륙했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시장에서 예상 밖으로 고전했다.
국내 대형마트들은 창고형이 아니 백화점식으로 진열대의 높이를 낮추고, 대형 포장 대신 낱개 포장을 늘리는 ‘한국형 할인점’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결과는 토종들의 판정승이었다. 이마트는 2006년 월마트의 점포 16곳을 인수했다. 까르푸는 같은 해 이랜드에 점포를 팔고 한국에서 철수했다. 이효율 풀무원식품 대표이사는 “당시 국내 할인점이 외국계 할인점에 자리를 내줬다면 국내 제조사들의 판로가 불안정해지는 아찔한 결과가 초래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마트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학원이나 문화시설까지 갖춘 3만 m²(약 9075평) 이상의 복합시설로 변모하는 등 확장기를 맞이했다. 대형마트들은 당시 매년 10개 이상의 점포를 추가로 열었다. 또 기존 제품보다 가격이 20∼30% 싼 자체브랜드(PB) 상품을 식품과 생활용품 등으로 확대하고 ‘통큰 치킨’(롯데마트)이나 ‘이마트 피자’, ‘반값 TV’ 등 가격을 절반으로 낮춘 상품을 잇달아 내놓아 화제가 됐다.
하지만 공격적인 사업 확장에 따른 그늘도 적지 않았다. 특히 대형마트 출점에 대한 영세상인들의 반발로 지난해 4월 대형마트 의무휴업 제도가 시행되는 등 각종 규제가 만들어졌다.
현재 대형마트는 각종 규제 외에도 시장 포화와 소비경기 침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대형마트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6%나 줄었다. 국내 사업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한 해외 사업도 신통치 않다. 이마트는 1997년부터 일찌감치 중국에 진출했지만 실적 부진으로 상당수 점포를 정리했고, 롯데마트도 2007년부터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서 사업을 했지만 해외에서는 아직 흑자를 못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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