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씨는 최근 자신 소유의 오피스텔 세입자에게 전세 보증금으로 받은 현금 5000만 원을 은행에 예금했다. 은행은 즉시 A 씨의 입금 내용을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알렸다. 2000만 원 이상의 현금 거래는 금융기관이 FIU에 의무적으로 보고해야 한다. A 씨는 전문직 종사자로 국세청이 세금 탈루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는 ‘의심 리스트’에 포함된 인물.
A 씨 같은 경우 지금까지는 딱히 국세청 조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FIU가 수상한 현금 거래로 판단하거나 조세 범칙 사건에 연루된 의혹이 있을 때만 세무당국에 거래 내용을 통보하기 때문이다. 한 해 고액 현금거래는 1000만 건이 넘지만 국세청에 통보되는 건 1% 남짓이다. 14일부터는 달라진다. 국세청이 A 씨의 세금 탈루를 의심하면 그의 고액 현금거래 정보를 FIU에 요청해 받을 수 있게 된다.
14일부터 시행되는 ‘특정 금융 거래 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앞두고 은행권은 분주하고, 자산가들은 긴장하고 있다.
가장 민감해하는 이들은 고정적으로 현금 수입을 얻는 전문직이나 사업가이다. 하루 2000만 원 이상의 현금을 입금하거나 출금하면 거래자의 신원, 거래 일시, 거래 금액 등이 FIU에 전산으로 자동 보고되는데 국세청과 관세청이 이 정보를 요청할 수 있게 된다.
금융권에서는 금융 거래 정보 노출을 꺼리는 이들의 은행 ‘퇴장’이 연초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시중은행 PB센터 팀장은 “고액 자산가들은 지하경제 양성화 얘기가 나온 연초부터 은행 거래 비중을 줄이고 보유한 현금을 펀드에 투자하는 등 금융 포트폴리오를 많이 바꾸었다”며 “현금이 고정적으로 나오는 이들 중 일부는 집에 금고를 마련해 현금을 넣어놓거나 은행 대여금고를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은행은 ‘자금 세탁’ 등의 위법이 명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객에게 가급적 현금 거래를 피하도록 유도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가령 고객이 현금을 들고 와 입금을 요청하면 2000만 원을 넘지 않게 쪼개서 입금하게 하거나 수표, 계좌이체 등의 방법을 넌지시 알려주는 방식이다.
은행 관계자는 “FIU에서 국세청으로 정보를 넘겼을 경우 고객에게 통보하도록 되어 있어서 민원 발생 소지도 있다”고 말했다.
은행권은 의심거래 기준금액이 폐지돼 업무 부담이 커졌다. 의심거래는 현재 1000만 원 이상 또는 5000달러 이상의 거래 중 금융재산이 불법재산이거나 자금세탁 혐의가 있으면 FIU에 보고하게 되어 있다. 14일부터 기준금액이 폐지돼 1000만 원 미만 거래일지라도 자금세탁 혐의가 의심되면 보고를 해야 한다. 제대로 보고하지 않으면 직원이 ‘방조죄’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의심거래 건수는 2002년 275건을 시작으로 매년 증가해 지난해 말 29만여 건으로 급증했다. 지난해에는 이 중 2만2000여 건이 국세청 등에 제공됐다.
은행들은 14일 시행에 앞서 내부 업무처리지침을 개정하고 전산시스템을 정비했다. 창구 직원에게 어떤 경우에 의심거래로 볼 수 있는지 매뉴얼을 만들어 교육시키고 있다. 과거에 축적한 의심거래 유형을 분석해 자체 기준을 만들어 배포한 은행도 있다. 한 은행의 FIU 담당자는 “올해 초부터 의심스러운 거래 패턴을 뽑아 실제 그러한지 유효성을 검증해 보는 작업을 계속 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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