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국민은행의 오랜 고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성 독자가 동아일보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은행에 전화할까 하려다 믿음이 가지 않아 신문사에 전화했다”며 “내 전 재산이 모두 국민은행에 있는데 이런 은행을 믿고 거래해도 되는지 불안해서 잠도 잘 안 온다”고 말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국내 최대 자산을 보유하고 2800만여 명의 고객을 가진 KB국민은행의 비리와 부실은 은행을 믿었던 고객에게는 ‘충격과 두려움’이다. 국민은행은 도쿄지점의 1700여억 원 부당대출과 예·적금 담보대출 이자 과다수취 등 부실·비리 사건으로 금융감독원의 특별 검사를 받고 있다. 이 상황에서 23일 은행 본점 직원들이 채권을 위조해 90억 원을 빼돌린 사건까지 터졌다. “은행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터졌다”는 비판이 국민은행에 쏟아졌다. 금융당국 수장들까지 나서 연일 “관계자는 물론이고 경영진에게도 책임을 묻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KB금융 내부에서는 “인사 논란이 자주 불거지더니 대형 내부비리까지 터졌다” “이번 기회에 문제점을 싹 정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그 목소리들 가운데 “내 잘못이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겠다”는 자기반성은 찾기 힘들다.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사건에 대해 은행 측이 고객에게 공식적으로 표명한 입장은 23일 보도자료를 통해 기자들에게 전달된 네 줄 분량의 사과문이 전부다.
현 경영진이 이번 위기의 잘못을 전직 경영진에게 돌리는 듯한 교묘한 ‘선 긋기’ 느낌도 든다. 현재 KB금융과 국민은행의 최고경영진을 비롯한 상당수 임원은 어윤대 전 KB지주 회장과 민병덕 전 국민은행장 시절에도 임원급 자리에 있었다. 최근의 부실과 비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다. KB금융 관계자는 “현 경영진이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임영록 회장은 당시 어 회장 밑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고 이건호 행장도 최근 벌어진 사건들과의 업무 연관성이 크지 않았다”고 말했다.
2008년 9월 GS칼텍스 자회사의 직원이 1000만 명이 넘는 고객정보를 유출한 사건이 발생했다. 나완배 당시 GS칼텍스 사장은 직접 나서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고객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본인이 책임을 맡는 대책반을 만들고 홈페이지에 고객정보 유출 사실에 대한 사과문도 게재했다. 최고경영자(CEO)가 고개 숙여 사과하고 대처하는 모습에서 진정성이 느껴진 덕분인지 여론은 더는 나빠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국민은행을 믿고 거래한 고객들이 원하는 것은 ‘책임 전가’보다는 통렬한 자기반성에서 우러난 진정한 사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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