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칠레 이건 라우타로의 백오현 법인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직원들이 합판용 원목을 벌목하는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이건 라우타로는 합판용 원목의 3분의 1을 자체 조달하고 있다. 이건 라우타로 제공
침대가 심하게 흔들렸다. 불을 켜려 했지만 진동이 심해 몸을 일으킬 수조차 없었다. 이미 침대는 2m 정도 움직여 있었다. 어둠과 두려움 속에 흔들림이 멈추기를 기다리는 90초가 90분 같았다. 진동이 잦아들어 집에서 나오고서야 지진이 난 걸 알았다.
2010년 2월 27일 오전 3시 30분경 규모 8.8의 강진이 칠레 전역을 뒤흔들었다. 1960년 규모 9.5의 ‘발디비아 지진’ 이후 칠레에서 발생한 가장 강력한 지진이었다.
목재 전문 기업인 이건산업의 칠레 현지 법인 ‘이건 라우타로’의 백오현 법인장은 20일 전화 인터뷰에서 “생전 처음 지진을 겪은 그날이 법인장으로 부임한 날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50년 만의 지진, 위기가 기회로
백 법인장은 잠옷 차림으로 곧장 공장을 향해 차를 몰았다. 공장은 수출용 합판을 만들기 위해 24시간 가동 중이었다. 내진 설계가 잘돼 있어 공장이 붕괴되는 것은 피했지만 원자재와 완제품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게 없었다. 철제 설비들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수출항 콘셉시온이 지진으로 큰 피해를 본 것도 문제였다. 이건 라우타로는 전체 생산량의 90% 이상을 콘셉시온을 통해 수출하던 차였다. 한국 본사와도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항구가 언제 복구될지 가늠할 수 없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지진 복구를 위한 합판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 회사는 창고에 쌓여 있던 수출용 합판을 지진 복구 현장으로 보내며 ‘특수’를 누렸다. 이건 라우타로는 2010년 한 해 동안 전년보다 100억 원 많은 580억 원을 벌어들였다.
○ 20년 만에 생산 능력 50배 성장
1993년 세워진 이건 라우타로는 올해 20돌을 맞았다. 설립 초기에는 합판 원료를 생산해 한국 본사에 납품했지만 지금은 합판 완제품을 미국 유럽 일본 호주 등에 수출하고 있다. 1993년 월 400m³이던 합판 생산 능력은 설비 확장 공사가 끝나는 내년 초에는 설립 첫해의 50배인 월 2만 m³로 늘어난다. 매출도 10년째 늘고 있다. 2003년 160억 원이던 연 매출은 지난해 이건산업 전체 매출의 4분의 1과 맞먹는 670억 원으로 늘었다.
이건 라우타로는 현지에서 조림 사업도 하면서 질 좋은 원목을 싸게 조달할 수 있었다. 특히 ‘라디에타 파인’으로 만든 합판이 5년 전부터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서도 단 한번도 매출이 줄지 않았다. 또 칠레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역협정을 맺은 덕분에 해외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점도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이건 라우타로는 3년 전부터 한국 본사의 생산량을 추월하며 이건산업의 핵심 생산기지로 자리매김했다. 이 회사는 칠레 경제에 기여한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달 칠레 목재협회가 선정하는 공로상을 받았다. 이건 라우타로는 앞으로 칠레를 교두보로 삼아 브라질 등 중남미 시장을 공략하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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