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풀색의 ‘모하비’ 차량에서 내린 노인은 거구였다. 등산용 지팡이를 짚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회사 직원들이 눈으로 조각을 만드는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경기 양주시 장흥면의 산자락을 찾은 참이었다. 키가 190cm에 육박하는 노인은 두 시간여 동안 1000개의 조각이 늘어선 산을 지치지 않고 오르내렸다.
이 노인은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69)이다. 재계에서 ‘괴짜 최고경영자(CEO)’로 통하는 그는 “안주하는 삶은 재미없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윤영달의 꿈은 자전거포 주인이었다. 기계를 분해하고 조립하길 워낙 좋아해서였다. 대학 시절엔 문학에 빠져 월간지 ‘문학’을 창간했다. 30대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업을 팽개치고는 자동차 부품 회사를 차리고 풍력발전에 대한 서적을 번역하기도 했다.
다음은 윤 회장과 함께 산자락을 오르내리며 들은 그의 인생역정이다. 그는 하이힐을 신은 기자를 위해 등산화를 준비해 건넸다. ■ 출발 “리어카를 끌어라”
“산도(크라운제과의 대표 과자) 있어요?”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청년 윤영달은 24세이던 1969년 부친(윤태현 창업주·별세)이 세운 크라운제과에 입사했다. 아버지는 “영업력이 약하다”는 말을 넌지시 건넸다. 청년은 곧장 서울 동대문 방산시장으로 향했다.
여러 가게를 돌아다녔지만 상인들은 산도를 진열대에 내놓고 팔지 않았다. 당시 제과업계의 메이저는 해태와 오리온이었다. 크라운제과는 그들 틈에 끼지 못했다.
때마침 코카콜라 트럭이 돌아다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코카콜라는 자동차에 제품을 싣고 직접 소매상에 납품을 하고 있었다. 차가 필요했지만 영세한 크라운으로서는 무리였다.
‘리어카는 어떨까’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윤영달은 한 지역을 정해 실험해 보기로 했다. 최종 선정된 곳은 도매상의 영향력이 적은 전북 전주였다. 당시 전주의 과자 가게들은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물건을 받고 있어 도매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직접 제품을 납품할 수 있었다.
윤영달은 직원들과 함께 리어카로 산도를 날랐다. 가게 주인들은 처음에는 시큰둥했지만 윤영달과 직원들이 가게 앞 청소도 해주고 제품 진열도 도와주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직접 과자를 사겠다”는 곳이 여럿 나왔다.
서울로 돌아온 윤영달은 영업사원을 뽑아 전국적인 직판 체계를 만들었다.
“우리가 직접 가게의 좋은 장소에 제품을 진열할 수 있었고, 도매상이 가져가는 마진도 없어졌어요. 결과적으로 회사의 투자 여력이 높아지고 판매가격은 낮아졌죠.”
이후 제과업계에서는 도매시스템이 없어졌다.
윤영달은 과자를 직접 개발하기도 했다. 1972년 미국의 시리얼 공장에 갔을 때 설비를 눈여겨본 후 귀국해 만든 것이 바로 ‘죠리퐁’이다.
“당시 한국엔 뻥튀기밖에 없었어요. 한국에서도 식사 대용의 과자를 만들 수 없을까 고민했죠. 귀국하자마자 사무실에 기계를 갖다 놓고 골몰하다가 뻥튀기 기계에서 힌트를 얻어 죠리퐁을 개발하게 됐습니다.”
시장에서 유사품이 쏟아졌지만 기술력은 따라오지 못했다. 윤영달은 철망 위에 죠리퐁 원료를 코팅해 올려놓고 밑에서 위로 바람을 쏘아 올려 죠리퐁 특유의 바삭함을 만들어냈다. 반면 유사 제품들은 제대로 건조가 안 돼서 눅눅하거나 딱딱했다. ■ 외도 부동산 투기꾼 치곤 이상한 사람
차츰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현실에 안주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리 잘해도 ‘아버지 회사’였기 때문이었다.
자기만의 사업을 해보고 싶었던 그는 과자포장업체를 세웠다. 초반엔 그런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크라운제과 아들’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경쟁업체의 일을 따내는 게 어려워졌다. 업종을 바꿔 자동차 부품 회사를 차렸다. 불량 부품을 사들여서 개선한 뒤 정품보다 낮은 가격으로 팔았다. 2∼3개월 연구하면 부속을 새로 끼워 넣거나 특정 부분을 깎아내는 방식 등으로 해결책이 나왔다. 사업은 안정적으로 굴러갔다.
호시절은 잠시로 끝났다. 윤영달은 세무조사를 받았다. 풍력발전에 관심을 갖고 바람이 센 지역의 땅을 사들인 게 화근이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서 풍력발전이 각광받을 것으로 보고 해외의 관련 서적을 번역해 책으로 펴낸 그였다. 직접 풍력발전 사업을 해볼 요량으로 자동차 부품 공장을 해 번 돈으로 바람이 좋은 곳의 땅을 샀다. 모두 120만 m²(약 36만3000평) 정도 됐다. 국세청은 부동산 전산화 작업을 하다가 윤영달이 크라운제과 창업자의 장남인 걸 알고 세무조사를 시작했다.
“풍력발전을 하려면 바람이 세야 했어요. 모래가 있으면 안됐고 나무는 비뚤어져 있어야 했지요. 내가 산 땅은 국립공원 근처나 기암절벽 등에 있어 다른 용도로는 개발 가치가 거의 없었어요.”
그에게는 ‘부동산 투기꾼’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억울했다. 풍력발전 자료를 담은 상자 20여 개를 국세청에 들고 가서 복도에 쭉 펼쳐 놓았다. 국세청 공무원들은 “부동산 투기꾼 치고는 특이하다”고 했다.
세무조사의 후폭풍은 컸다. 사업은 내리막길을 걸었고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직원 월급 줄 돈이 없어서 여기저기 손을 벌리고 다녔다. 쌓여 있는 재고들은 어깨를 짓눌렀다.
“죽어버릴 심산으로 한강으로 향했죠. 시커먼 물결이 출렁이더군요. 무서워서 다시 집으로 도망갔어요. 죽음의 공포를 봤던 거죠. 차라리 삶의 고통과 싸워서 이기는 게 쉬워 보였어요.” ■ 복귀 죽을 각오로 되살린 회사
1995년 크라운제과로 복귀한 윤영달은 대표이사가 됐다. 하지만 3년 뒤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환율 폭등으로 빚더미에 앉게 됐고 1998년 회사는 부도 처리됐다. 기업인으로서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속도로에 안개가 확 끼어버린 것 같았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영업력을 복원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고안해낸 게 ‘꽃잎전략’이었다.
“각지의 거점 영업소를 중심으로 타원형의 동선을 그리면서 가게들을 돌았지요. 그렇게 꽃잎 한 개를 완성하고, 다음 날은 다른 방향으로 돌면서 또 다른 꽃잎을 완성해 4일 코스로 꽃잎 4개를 그리는 방식이었죠.”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업사원을 대동하고 현장을 뛰었다. 채권단도 자구노력을 인정해 크라운제과의 경영권을 유지하게 해줬다. 매출 회복에 탄력이 붙자 윤영달은 또 다른 작업에 들어갔다.
“살아남으려면 덩치를 키워야 했죠. 마침 외국계가 지분을 보유한 해태제과가 매물로 나왔어요. 해태제과 매출은 크라운제과의 두 배가 넘었지요. 자금력이 달려서 군인공제회와 협력업체를 찾아가서 ‘우리 어린이들에게 국산 과자를 먹여야 한다’고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결국 그는 해태제과 인수에 성공했다. 롯데제과 해태제과 오리온에 이어 만년 4위였던 크라운제과는 해태제과 인수에 성공해 크라운해태로 거듭나면서 과자업계 2위로 올라섰다. ■ 고민 “과자는 꿈인데…”
회장 윤영달에게는 현재 고민이 적지 않다. 최근의 저출산 기조와 참살이(웰빙) 열풍으로 과자 산업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과자는 성인병의 원인으로 비난받고 있고, 마트의 ‘1+1 행사’는 일상이 됐다.
“요새는 과자에 미래가 없어요. 젊은 엄마들은 애들에게 과자를 못 먹게 하죠. 우리 어렸을 적에는 과자를 소풍갈 때나 맛볼 수 있었어요. 과자는 많이 살 수도 없는 귀한 음식이었잖아요. 한마디로 꿈이었는데….”
그러다 예전 아이들이 과자를 보고 느꼈던 두근거림을 되살리려면 감성을 덧입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무엇이든 과잉인 시대잖아요. 과자는 배불리 먹는 것이 아닌, 영혼을 충족시켜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과자야말로 감성이 지배하는 품목이죠. 과자는 꿈이고, 추억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문화를 과자에 접목하는 방안을 고안하고 있다.
“과자가 맛으로 승부를 거는 시대는 지났어요. 과자는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주는 매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과자에 감성을 덧입히려면 과자 개발자나 마케터는 물론이고 영업·배송사원 등 전 직원이 감성적인 토대를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크라운해태 임직원들은 2004년부터 조각, 유리공예, 장승 깎기, 판소리 등 각종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어떤 직원들은 “업무보다 문화 활동을 하는 시간이 더 많은 날도 있다”며 “본업과 문화 활동이 헷갈릴 지경”이라고 말한다. 크라운해태가 직원들의 문화예술 관련 프로젝트에 쏟아붓는 금액은 연간 수익의 10%에 이른다. ■ 미래 안주하는 삶은 재미없다
윤영달은 요즘 부친이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사들였던 양주시 장흥면 산자락의 땅 330만 m²(약 100만 평)를 복합문화단지인 ‘송추아트밸리’로 조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송추는 서울에서 가깝고 계곡도 좋아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가족 나들이 장소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러브호텔들이 들어서면서 옛 정취를 잃어버렸고, 최근에는 모텔을 찾는 손님도 줄면서 퇴락한 동네가 됐어요.”
그는 송추의 러브호텔들을 사들여 예술가가 활동할 수 있는 아틀리에로 바꿨다. 이들에게 내건 조건은 단 하나. 자유롭게 작업을 하되 크라운해태 직원들이 요청하면 언제든지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다. 올해 1월 양주시에서 열린 ‘양주눈꽃축제’에서 크라운해태 직원 1000명이 선보인 눈조각 1000개도 아틀리에에서 활동하는 조각가들의 도움을 받아 탄생했다.
눈조각 완성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 직원들은 조각가들에게 기초를 배우고 작품 콘셉트를 함께 기획하는 한편 스티로폼으로 조각 연습을 했다. 또 전시를 한 달 앞둔 올해 1월에는 매일 양주로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조각에 전념했다.
“사람은 창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게 되죠. 새로운 일도 하는데 하물며 기존에 했던 업무는 어떻겠느냐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또 예술이라는 노동을 통해 뇌와 몸이 협업할 수도 있어요.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사고하면서 예술적 감성을 충전하는 것이지요.”
쓸데없는 짓을 벌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미래가 있어요. 직원들이 오랜 시간 갈고닦은 감수성을 언젠가는 과자에도 접목해서, 고객들에게 행복이라는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윤영달은 젊은 시절 연구했던 풍력에 대한 미련도 버리지 못했다. 송추아트밸리를 풍력과 바이오에너지 등을 이용하는 에너지 자급자족 지역으로 만들 계획이다.
“아내는 저더러 ‘그만 좀 나대라’고 합니다. 하지만 뭔가를 찾아 나서야 재미있지…. 그게 삶의 보람 아니겠어요? 가만히 있으면 뭐 하나요.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더 살겠어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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