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개발직, 근로시간 단축 어찌하오리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31일 03시 00분


휴일근로 사실상 없애는 개정안… 4월 통과 앞두고 기업들 한숨

“근로기준법이 현재 안 그대로 개정되면 한창 일하고 있는 연구개발(R&D) 인력들을 강제로 집에 보내야 할 판입니다. 신제품 및 신기술 개발에도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됩니다.”

4대 그룹의 인사담당 임원 A 씨는 최근 정부와 정치권에서 논의하고 있는 근로시간 단축 방향에 대해 이같이 지적했다. 직군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생산직 위주로 법 개정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르면 다음 달 임시국회에서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에 포함시키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되도록 노력한다는 입장이다. 법이 개정되면 주당 최대 68시간인 법정 근로시간은 52시간으로 줄어든다.

A 씨는 “R&D 직은 프로젝트를 맡으면 3∼6개월씩 집중해서 일하고 이후 한동안 쉬기도 하는데 법이 바뀌면 이런 방식이 불가능해진다”며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며칠씩 밤샘 작업을 했다가는 근로시간 초과로 기업들이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 “근로시간 단축, R&D에 독”

국내 대기업들은 R&D 역량을 집중적으로 키우면서 발전해왔다. 애플이 선점한 스마트폰 시장에서 후발 주자인 삼성전자가 1위로 올라선 것도 R&D 담당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술 개발에 매달렸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자동차와 반도체 등 현재 국내 수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력 업종 대부분이 그렇다.

국내 기업들의 R&D 인력 비중 역시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 임직원 9만5798명 중 4만3948명(45.9%)이 R&D 인력이다. 2000년 26%에서 20%포인트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반면 생산직은 같은 기간 45%에서 34%로 줄었다.

현대·기아자동차도 2000년대 초반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품질 경영’을 선언한 뒤 R&D 인력을 크게 늘려왔다. SK하이닉스도 전체 직원 2만5000여 명 가운데 20% 이상이 R&D 직군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최근 선전하는 데는 기술 경쟁력 확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근로시간 단축으로 기업들의 R&D 활동이 지장을 받는다면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 “재량근로제 현실화 시급”


근로기준법은 생산직의 근로시간을 관리하고 초과 근로를 제한하기 위한 방안으로 1953년 제정됐다. 산업 구조가 크게 바뀐 현재도 생산직 위주로 근로시간 단축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재량근로제를 해법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재량근로제는 실제 근로시간을 측정하기 어려운 직무에 한해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을 적용하지 않고, 수당 또한 성과를 기초로 책정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1997년 도입됐으나 2011년까지 이를 적용한 기업은 전체의 4.1%에 그쳤다. 근로기준법 시행령에 ‘신상품 또는 신기술의 연구개발 업무’ 종사자를 재량근로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돼 있지만 기준이 모호해 기업들이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예컨대 새로운 스마트폰을 개발할 때 전화기 개발자나 통신 전문가 외에도 액정표시장치(LCD)나 반도체 개발 인력 등 다양한 인력이 참여한다. 기업들은 어떤 사람은 재량근로 대상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제외해야 하는지 정하기 어려워 아예 재량근로제를 도입하지 않고 있다. 국내 한 대기업 관계자는 “함께 일을 하면서도 일부만 재량근로 대상자가 되면 프로젝트 참여자끼리 위화감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도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도입을 위해서는 노사 합의가 필요하지만 노동계는 “실질임금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며 반대하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재량근로제의 범위를 더 넓히고,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정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R&D처럼 집중근로가 필요한 직군을 52시간 근무라는 틀에 가둬 버린다면 근로자나 회사 모두 손해”라며 “정부는 입법 과정에서 R&D나 사무직의 근로시간 경직성을 해소하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창규 kyu@donga.com·김창덕 기자
#연구개발직#근로시간 단축#휴일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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