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설립된 독일의 피도르 은행은 점포가 한 곳도 없다. 계좌 개설, 상담, 거래와 같은 은행 업무는 모두 페이스북, 홈페이지 등을 통해 온라인으로 이뤄진다. 은행 페이스북 계정의 ‘좋아요’ 클릭 수가 1000회 늘어날 때마다 고객의 예금금리를 0.1%포인트 올려주는 독특한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이 은행의 진가는 다른 부분에 있다. 고객이 직접 영업에 참여하는 ‘커뮤니티은행’을 표방한다는 점이다. 은행 홈페이지에는 기존 상품에 대한 평가, 새 상품 아이디어, 재테크 상담과 조언 등에 대한 고객들의 글이 수천 건 게시돼 있다. 고객들의 의견은 금융상품과 서비스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2. 중국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가 내놓은 금융상품 ‘위어바오(餘額寶)’에는 현재 8000만 명이 넘는 고객이 가입했다. 위어바오는 온라인 쇼핑몰의 거래 계정에 남아있는 고객의 여윳돈을 자산운용사에 맡겨 불려주는데, 개인이 접근할 수 없는 은행 간 자금시장에 투자하기 때문에 다른 예금상품보다 수익률이 훨씬 높다. 계좌를 열 때나 중도에 해지할 때에 수수료를 낼 필요가 없고 수시로 입출금이 가능하다. 중국에선 이처럼 정보기술(IT)기업이 은행업에 진출하는 ‘금융 빅뱅’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알리바바의 경쟁업체인 텐센트가 올해 초 온라인 펀드상품인 ‘리차이퉁’을 내놨고 검색업체 바이두(百度), 유통업체 쑤닝(蘇寧) 등도 유사한 금융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 세계 금융시장에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경기침체와 저금리를 돌파하기 위해 IT 등을 활용한 다양한 금융 모델이 등장하고 있는 것. 전문가들은 수익성 악화로 한계상황에 직면한 국내 금융회사들이 세계로 눈을 돌려 벤치마킹 대상을 찾고 위기를 기회로 삼는 또 하나의 ‘금융 혁명’에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 수익성 줄고, 고객 떠나가고…이중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5년이 지났지만 국내 금융사들은 최악의 보릿고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금리, 저성장으로 은행과 보험사들은 수익성 악화에 직면해 있고 증권사들도 거래량이 줄어 혹한의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올해 1분기(1∼3월) 국내은행의 총자산순이익률(ROA), 자기자본순이익률(ROE) 등 경영지표는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래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대출금리 하락으로 이자수익이 줄면서 은행의 수익성을 보여주는 순이자마진(NIM) 역시 2009년 2분기 이후 가장 낮은 1.80%까지 하락했다. 3∼4% 안팎인 선진국 은행들의 절반 수준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저금리 상황에서 은행들이 엇비슷한 금융상품으로 치열한 금리 경쟁을 벌이다 보니 전반적인 이자수익 감소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외진출이나 신사업 개발 등으로 이렇다 할 돌파구를 마련하지도 못했다. 1분기 국내은행의 총이익 중 이자이익의 비중은 93%로 1년 전(88%)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다.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시장환경이 급변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예금보다 대출금리를 높게 매겨 수익을 얻는 전통적인 이자수익 모델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보험 증권사 등 비은행 금융사들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경기침체와 경쟁 격화, 금융규제 강화 등으로 인해 위탁매매수수료율, 가맹점수수료수익률, 운용자산이익률 등 증권 카드 보험사의 핵심수익률은 2009년 이후 하락하는 추세다. 지난해 증권사의 당기순이익은 2012년 대비 73% 급감했고, 생명보험사들도 ‘3강(强)’으로 꼽히는 삼성·한화·교보생명이 모두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 ‘저성장의 돌파구’ 금융 혁명은 IT에서 시작
국내 금융사들도 경영난을 돌파하기 위해 수년 전부터 자구책을 강구해왔다. 포화상태인 국내시장을 넘어 아시아 등 해외로 진출을 확대하고, 적자 점포를 서둘러 정비하면서 비(非)이자수익 등 대체 수익원을 모색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금융회사가 미래에도 살아남으려면 ‘금융 혁명’ 수준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윤창현 한국금융연구원장은 “금융회사들이 돈벌기가 쉬웠던 예전과 달리 금융위기를 지나면서 완전히 새로운 환경의 ‘뉴 노멀’이 나타났다”며 “바뀐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금융산업 전략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금융 혁명’의 첫 단계로 꼽히는 것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대표되는 IT와 금융의 결합이다. 로버트 실러 미국 예일대 교수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IT라는 새로운 스토리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앞으로 금융산업의 가장 큰 과제”라고 지적했다. 독일 피도르 은행과 중국의 위어바오는 IT를 금융에 잘 접목한 사례로 꼽힌다.
최근에는 소비자들의 금융거래 데이터를 수익으로 연결하는 ‘빅데이터’ 기반의 신종 금융업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카드리틱스’는 시중은행들과 제휴해 고객들의 카드 결제 기록을 넘겨받아 맞춤형 광고를 원하는 유통·제조기업에 마케팅을 위한 분석 자료를 제공한다. 은행, 유통업체뿐 아니라 광고를 통해 제품을 사는 소비자도 캐시백을 받을 수 있어 이득이 된다.
김용아 맥킨지&컴퍼니 시니어 파트너는 “한국 금융사들은 지나치게 이자수익에 의존하고 해외 사업비중이 낮다는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다”며 “비즈니스 모델과 재무성과, 기업문화 등 세 가지 부문에서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중산층 붕괴 - 고령화 - 막대한 가계빚 ‘트리플 악재’ ▼ 한국 금융회사가 직면한 환경
한국의 금융회사들은 이익감소 외에도 막대한 가계부채와 한계기업 증가에 따른 대출 부실, 중산층 붕괴와 고령화에 따른 시장 변화 등 갖가지 악재에 직면해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사회적 변화가 금융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주면서 은행, 증권, 보험사 등이 사면초가에 몰린 형국이다.
최근에는 조선 해운 건설 등 취약업종에서 기업 부실이 늘면서 은행 수익성에 부담을 주고 있다. 한국은행의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이익으로 이자를 감당할 수 없어 이자보상비율이 3년 연속 100% 미만인 한계기업의 수가 2009년 말 2019곳에서 2012년 말 2965곳으로 불어났다. 이런 부실기업의 증가는 대출해준 금융기관의 건전성 악화로 이어진다.
1000조 원을 넘긴 가계부채는 지난 10여 년간 국내 금융권의 최대 리스크로 꼽혀 왔다. 금융사들은 이미 가계 빚 규모가 임계점을 넘어 개인금융 영업을 더 확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가계 빚 상환능력 악화→부실채권 증가→금융권 손실’로 이어지는 위기가 닥칠 수 있다. 다행히 최근 들어 부채 총량의 증가세가 다소 주춤한 모습이지만 부채의 질은 나빠지고 있다.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 대출이 급증하면서 가계의 재무건전성을 악화시키고 있다.
고령화의 진전과 중산층의 붕괴 현상 역시 이자수익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는 금융사들에는 위협요인이다. 장년층의 조기 은퇴와 일자리 감소로 경제활동 비중이 줄면 저성장·저금리 현상이 빨라지고 금융사들의 금리 마진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보험사들 역시 평균수명이 예상외로 늘어나면 연금보험금 지급액이 증가하기 때문에 경영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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