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간 소비자들에게 큰 피해를 끼친 금융사고가 잇따라 터지면서 금융에 대한 신뢰가 추락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올 1월 신용카드 개인정보 유출 사고 직후 카드사 사장 및 임원들은 기자회견을 갖고 고객들에게 허리 숙여 사과했다. 동아일보DB
세계 금융권은 지금 ‘신뢰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유럽 주요국 등 선진국 금융업체들도 잇따라 터지는 금융사고로 비난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금융사들이 무엇보다 먼저 신뢰 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 인프라인 금융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실물경제와 국가 재정시스템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28일 ‘2014 동아국제금융포럼’ 참석을 위해 방한하는 로버트 실러 미국 예일대 교수는 “지금의 풍요를 안겨준 경제발전의 역사는 결국 금융 시스템에 토대를 두고 있다”며 “금융은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잇따른 금융사고가 부른 ‘신뢰 위기’
지난해부터 불거진 국내 금융권의 사고와 비리는 은행은 물론이고 증권, 보험, 카드, 캐피털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터지고 있다.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금융당국이 재발방지 대책을 쏟아냈지만 ‘사후 약방문’이란 비판을 받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08∼2013년 국내 은행권에서 발생한 금융사고 건수는 311건, 규모로는 7787억 원에 이른다. 금융당국은 올 하반기부터 은행의 모든 금융사고를 공시를 통해 공개하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했다. 수천억 원대의 대형 금융사고가 터졌을 때만 공시하도록 규정하다 보니 은행 스스로 사고에 둔감하게 대응한다는 판단에서다.
최근 잇따라 발생한 금융사고는 국내 금융사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와 허술한 내부통제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경보음이다. 올 1월 터진 신용카드 개인정보 유출사고는 금융사들이 고객정보를 함부로 수집해 얼마나 허술하게 다루고 있는지 드러냈다. 한 시중은행에서는 팀장급 직원이 자신의 막도장을 이용해 1조 원대 거래명세가 찍힌 허위서류까지 발급했다. 5만여 명의 개인투자자에게 피해를 안긴 ‘동양그룹 사태’는 금융 계열사를 보유한 오너의 도덕적 해이가 금융 소비자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일련의 사고들로 금융권이 외환위기 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며 “잘못된 관행을 털어내지 않는다면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금융 선진국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리보(런던은행 간 금리) 조작 사건이 대표적이다. 은행 간 단기거래 금리를 실제보다 낮게 신고해 차익을 부당 취득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대형 금융사들이 내야 할 배상액이 1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세계 경제를 1929년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에 빠뜨린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도 결국 금융상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교묘하게 포장해 위험을 떠넘긴 전형적인 ‘도덕적 해이’ 사례다.
○ “단기적 성과에만 집착 말아야”
최근 금융사고들의 1차적 책임은 부도덕한 잘못을 저지르는 금융사 직원들에게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단기적 성과에만 집착하게 만드는 금융사들의 경영방식에 근본적 원인이 있다고 진단한다.
이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금융사고에 대해 금융사의 책임을 엄히 묻고 있다. 2008년 1월 프랑스의 자산 규모 2위 은행인 소시에테제네랄(SG)에서 하루 만에 49억 유로(약 6조8893억 원)의 손실이 발생한 대형 금융사고가 터졌다. 31세의 입사 7년 차 딜러 제롬 케르비엘이 보안 프로그램과 문서를 조작해 회사가 정한 한도를 초과하는 선물(先物)거래를 했다가 거액의 손실을 낸 것이다. 올 3월 프랑스 대법원은 케르비엘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지만 은행 손실을 모두 그가 배상하도록 한 하급심 결정은 파기했다. 내부통제를 제대로 못한 금융사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뜻에서다.
배현기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소장은 “단기성과를 토대로 성과보수 지급과 인사 등이 이뤄지다 보니 최고경영자(CEO)부터 말단 직원까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구조가 만들어졌다”며 “오래 거래하는 고객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도록 평가기준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사고에 대해 관대한 처벌 양형 역시 개선돼야 할 부분이다. 국내 최악의 고객정보 유출사고를 일으킨 신용카드사에 대해 당국이 내린 제재는 과태료 600만 원과 영업정지 3개월이다. 영국 금융감독청은 2000년대 초반 보험상품을 팔면서 위험성을 고객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보험사에 벌금과 배상액을 합쳐 27억 파운드(약 4조6507억 원)를 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국에서는 다단계 금융사기를 저지른 버나드 메이도프 전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에게 전 재산 몰수 및 징역 150년형을 선고했다. 이와 함께 금융사들이 내부통제 시스템을 강력하게 구축하고 사고 발생 시 즉각 수습할 수 있는 매뉴얼을 갖추는 것도 필수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금융권이 신뢰를 회복하려면 무엇보다 경제 주체들이 금융권의 자정능력에 대해 긍정적인 믿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윤창현 한국금융연구원장은 “금융에 대한 신뢰 하락의 피해는 결국 소비자에게 돌아간다”며 “금융사, 금융당국, 소비자가 금융시스템의 신뢰 회복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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