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1135∼1136년)은 고려 왕조 당시 서경 천도파가 개경 문벌 귀족에 대항해 일으킨 정변이다. 당시 정부군을 이끌었던 김부식은 난을 진입한 공로를 인정받아 고려 역사상 유례가 없는 포상을 받았다.
하지만 김부식 휘하에서 반란 진압에 힘썼던 또 다른 장군 윤언이의 상소문에 기초하면, 김부식은 몇 가지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 당시 철옹성이라고 불리던 서경성이 함락된 데에는 윤언이가 화공 작전을 단독으로 감행한 공로가 컸다. 그러나 김부식은 서경성 함락의 공로를 윤언이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두 집안이 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탓이다. 윤언이의 활약으로 성벽이 무너졌지만, 정작 김부식은 처음엔 성내 돌입을 거부했다. 말도 안 되는 결정이었다. 일부 무장들이 반란해 결국 뒤늦게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이때에도 윤언이가 공을 세우지 못하도록 주 공격 방향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그를 보내버렸다. 한술 더 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윤언이를 치하하기는커녕 좌천시켜 버렸다.
사실 전 세계 전쟁사를 보면 이런 일이 의외로 자주 있다.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침공 때 전격전을 주장하고 관철시켰던 만슈타인은 막상 전쟁이 개시될 때는 공격을 맡은 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돼 전출됐다.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던 최고 사령부의 심술 탓이다.
아랫사람이 자기보다 뛰어나고 특출할 때 견제심리가 발동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라면 자신보다 뛰어난 부하도 자신을 위해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김부식은 최고의 영예를 누렸지만 그의 아들 김돈중은 1170년에 일어난 무신란 때 살해됐고 그의 집안은 이후 재기하지 못했다. 흔히 이 사건을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는 등 장군들을 모욕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근본 원인은 김부식 가문이 장군들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중심적이고 부하의 공을 가로채는 졸렬한 리더가 윤언이에게만 피해를 입혔을 리 없다. 김부식의 이기심은 김돈중 대에 이르러선 아랫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방종으로 악화됐을 공산이 크다. 그것이 무신란을 발생시킨 근본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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