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가 아닌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있다고 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며, 떨어진다고 해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남과 이별은 똑같이 선을 내포하고 있으며 똑같이 좋은 것이다. ―‘시몬 베유 노동일지’. (시몬 베유·리즈앤북·2012년) 》
사랑은 불가능한 욕망이다. 둘이 하나가 되다니 이 무슨 형이상학이란 말인가. 그런데 누구나 사랑을 한다. 스스로 온몸과 마음을 던져 사랑에 빠지고 다른 누군가의 불가능한 욕망을 드라마나 영화, 책으로 끊임없이 소비한다. 삶이 곧 거듭되는 사랑의 연속이다.
“신에게서 버림받은 존재들”이 만들어낸 이런 이야기에 매달리는 우리의 소비 행태를 뒤집어보면 신과 우리의 관계를 신학이나 철학으로도 따져볼 수 있지 않을까. 시몬 베유의 글들이 그렇다.
필자는 ‘행동하는 철학자’라고 하면 철학자 윤구병 씨와 시몬 베유를 떠올린다. 두 사람 모두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교수였고 농장으로, 공장으로 뛰어들어 몸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실천했다. 차이라면 윤 씨는 앞으로도 다양한 글과 실천을 통해 만날 수 있는 한국인이지만 베유는 히틀러를 피해 영국에서 머물다가 34세에 생을 마감한 프랑스 여성이라는 점이다.
“세계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한 문장이다. 우리들은 공을 들여 그 의미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는 것이다. 이 노력에는 언제나 육체도 참여한다.”
그의 철학적 글들은 온몸으로 부딪쳐 벼려낸 진솔함으로 웅숭깊다. 그는 우리의 손과 눈, 근육들을 단련해야 “자신이 비정상적이고 불완전하다고 느껴지는” 것을 관둘 수 있다고 조언했다. 사회 기성층에 대한 분노와 굶주린 자를 향한 유대감을 철학의 동력으로 삼고서 “순수는 더러움을 가만히 응시하는 힘”이라고 했다.
“이별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별이 고통스러운 건 사랑의 이별이기 때문이다. 봄철 내내 일그러진 대한민국의 실체에 좌절했던 우리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떠나보낼 건 떠나보내고 새로운 걸 맞이해야 할 때가 왔다. 꼭 6·4지방선거 얘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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