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석 달째를 맞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국내외 경제상황이 당초 이 총재가 예상한 그림과 판이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4월 취임 이후 그는 “금리 방향은 인하보다는 인상이 맞다”며 줄곧 매파(통화긴축 선호)적 성향을 보여 왔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가 국내 경기에 예기치 못한 큰 충격을 주고, 다른 나라들이 일제히 경기부양 모드에 들어가면서 그의 이런 모습이 안팎으로 도전을 받는 모양새다. ○ ‘인상’ 깜빡이 켜고 ‘직진’만 할 수도
지금까지 드러난 이 총재의 통화정책은 ‘인하’보다 ‘인상’에 무게중심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기자회견과 각종 행사 등을 통해 경기회복세와 향후 물가상승 가능성을 높게 보는 발언을 주로 했다. 그러면서 “만약 기준금리가 움직인다면 그 방향은 인상 쪽”이라고 분명하게 못 박았다. 시장은 이를 ‘이미 조준은 됐고, 방아쇠를 언제 당길지가 문제’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최근 각국의 통화정책 흐름이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한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미국이 금리인상 시기를 최대한 늦추며 통화완화 기조를 재확인한 데 이어 5일에는 유럽중앙은행(ECB)이 디플레이션 타개를 위해 금리인하를 단행하고 필요하면 추가 조치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중국 역시 최근 지급준비율을 낮춰 경기부양을 할 의사를 내비쳤다. 일본이 아베노믹스를 통해 ‘무제한 돈풀기’를 지속하는 것을 감안하면 세계 주요국이 모두 경기부양 모드를 고수하는 셈이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부문장은 “세월호 참사에 따른 경기침체에 유럽마저 금리를 내리는 상황에서 우리만 금리를 올리려고 하면 논란이 불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내경제 상황 역시 금리 인상을 어렵게 하는 쪽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선 세월호 참사로 내수 부진이 길어지면서 정부가 성장률 전망치를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원화 강세로 기업들의 채산성이 낮아지고 1%대 저물가가 지속되는 것도 금리인상 필요성을 낮추는 요인이다. ○ 역대 최장 동결 기록 깰까
당장 12일에 열릴 금융통화위원회의에 시장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은이 금리결정이나 경기진단에서 지금까지와 같은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다가는 경기가 둔화되는 데도 팔짱만 끼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
한은이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이달에도 연 2.5%인 기준금리를 유지하면 지난해 6월 이후 13개월째 동결이 된다. 역대 최장인 2009년 3월∼2010년 6월(2.0%, 16개월)의 금리 동결 기록에 한발 더 다가가는 셈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총재가 ‘시장과의 소통’을 강조한 나머지 통화정책의 장기 방향성을 선제적으로 제시한 것이 오히려 족쇄가 됐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외풍에 쉽게 휘둘리는 한국경제의 특징을 고려하면 글로벌 경제의 흐름을 조금 더 신중하게 지켜봤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요즘처럼 경기가 잘 안 풀리는 시점에선 상황만 지켜보기보다 유럽의 마이너스 금리 실험 같은 비전통적인 처방이라도 일단 시도해 봐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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