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두고 비싼 전·월세 사는 ‘슬픈 달팽이族’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5일 03시 00분


주택정책 사각지대 놓인 ‘집 있는 세입자’ 70만 가구

결혼 6년차 직장인 김정진(가명·40) 씨는 2009년 12월 신혼집으로 장만한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전용 59m²짜리 아파트가 거의 ‘남의 집’ 같다. 김 씨가 내 집에 산 기간은 고작 5개월. 2010년 4월 갑작스럽게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서 해당 집을 전세를 주게 됐기 때문이다. 3년 만인 지난해 4월 다시 서울로 발령이 났지만 전세 계약 기간과 맞지 않아 직장과 가까운 영등포구 양평동 아파트에 다시 전세로 들어갔다. 김 씨는 “양쪽 전세 기간이 계속 안 맞기 때문에 내 집에 다시 들어가 살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며 “팔 생각도 해봤지만 집값이 떨어져 결정을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김 씨처럼 내 집을 두고 다른 집에 전·월세를 사는 1주택자들이 주택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집 있는 세입자’들은 최근 주택 가격이 하락하면서 자산 활용 등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지만 전세를 얻을 때 주택금융을 지원받지 못하는 등 부동산 활성화정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들을 두고 주택업계에서는 체구보다 더 큰 집을 이끌고 힘겹게 기어가는 달팽이에 빗대 ‘슬픈 달팽이족’이라 일컫는다.

○ 정책에서 소외된 ‘낙동강 오리알’

24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12년 주거실태조사’ 결과 주택을 소유하고 있지만 전세, 월세로 사는 ‘집 있는 세입자’는 70만1163가구로, 전체 세입자 769만9386가구의 9.1% 수준이다.

수도권(서울 인천 제외)은 전국 평균보다 그 비율이 더 높았다. 수도권에 세를 사는 194만6049가구 가운데 13.6%인 26만4136가구는 다른 지역에 집이 있었다. 수도권에 집중된 직장 또는 교육 수요를 따라 타 지방에서 이주한 이들로, 다른 지역에 자기 집을 두고 수도권 내 비싼 전·월세 주택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황은정 주택산업연구원 정책연구실 연구원은 “집값이 오른 2006∼2009년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샀지만 부동산 경기가 최근 2, 3년 동안 정체돼 집을 팔지도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며 “자금 융통이 안돼 집에 발목을 잡힌 40, 50대 자가 가구가 많다”고 분석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세입자=무주택자’, ‘1주택자=실수요’, ‘다주택자=투기수요’로 보는 고정된 정책 프레임을 수십 년 동안 이어오고 있다. 이 때문에 주거가 불안정한 1주택자인 슬픈 달팽이족은 사실상 정책의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있다.

실제 각종 정책대출과 세입자를 위한 혜택은 무주택자에 한정돼 있다. 한국주택금융공사의 ‘내 집 마련 디딤돌 대출’과 국민주택기금의 ‘전세자금대출’은 부부합산 연 총소득이 각각 6000만 원, 5000만 원 이하인 무주택 세대주가 대상이다.

‘2주택 임대차시장 선진화 방안’으로 대상이 대폭 늘어난 월세 세액공제도 무주택자만 받을 수 있다. 내 집이 있으면 다른 집에 세입자로 살더라도 세금 감면을 받을 수 없다. 반면 1주택자라도 내 집을 전세주고 이 전세금을 은행에 맡기면 이자소득세를 내야 한다.

박원갑 KB국민은행 수석부동산연구위원은 “경제난 등으로 주거와 소유를 일치시킬 수 없는 1주택자에 한해 선별적으로 정부가 정책자금을 대출하는 등 긴급자금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전세금 상승의 고리 역할도

주거가 불안정한 1주택자들을 방치하면서 주택시장에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들이 직장이나 학군을 이유로 수도권으로 몰리면서 전세금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게 되고, 이렇게 오른 전세금을 대려고 다른 지역에 보유한 집의 전세금을 올리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김현아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건설경제연구실장은 “집은 있지만 주거가 불안한 ‘집 있는 세입자’가 늘고 있는 만큼 1주택자는 실수요자고, 2주택자 이상은 투기수요로 보는 시각을 이제는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달팽이족#집 있는 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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