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약 6000억 원의 매출을 낸 중견기업 A사 대표 이모 씨는 요즘 아침 신문만 펼치면 제일 먼저 환율 기사부터 들여다본다. 올 초만 해도 달러당 1060원대였던 환율이 반년 만에 1010원대까지 내려앉으면서 매출이 전년보다 수백억 원 줄었기 때문이다. 이 씨는 “매출의 90%를 수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환율이 10원만 빠져도 기업 운영이 힘들어진다”며 “전체 생산량의 15%인 국내 생산 물량마저 해외로 돌려야 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원-달러 환율 1000원 붕괴가 사실상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내 산업계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고 있다. 중소기업들의 경우 이미 버틸 수 있는 임계점을 넘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증권가의 분석에 따르면 최근의 환율 하락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수출 비중이 높은 기업들의 실적을 모두 갉아먹는 추세다.
○ 임계점 넘긴 환율, 이젠 대기업도 영향권
삼성전자는 올해 4월 진행한 투자설명회(IR)에서 환율 변동성을 향후 주요 리스크 중의 하나로 꼽았다. 당시만 해도 삼성전자는 환율 리스크가 상반기보다 하반기에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하지만 원화 강세의 공습은 예상과 달리 훨씬 더 일찍 찾아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해외시장에서 경쟁 중인 일본 업체들의 경우 연초부터 ‘엔화 약세’ 효과를 누리고 있어 가격 경쟁에서 타격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증권업계에서는 원화 가치가 1% 오를 때마다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4% 정도 낮아질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환율 하락으로부터 받는 충격은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KTB투자증권에 따르면 최근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2분기(4∼6월)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 합산 전망치는 1개월 전보다 각각 2.8%, 2.7% 감소한 상태다. 3개월 전과 비교하면 5.9%, 6.1% 줄었다. 실적 악화의 먹구름이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셈이다.
자동차 업종의 전망도 어둡다. 현대증권은 현대자동차의 2분기 영업이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9% 감소한 2조1900억 원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의 5월 보고서에 따르면 환율이 10원 하락할 때마다 국내 자동차 산업의 매출액은 4200억 원 감소한다. 채희근 현대증권 연구원은 “5, 6월 휴일 수가 평년보다 늘어 생산에 차질이 생겼고, 원화 강세의 영향을 받아 실적이 시장의 예상치를 밑돌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해외 생산 비중을 지난해 54%까지 늘려 환율 영향을 최대한 줄이고 있지만 수출 차종이 대부분 수익성과 매출이 높은 중대형 차량에 집중돼 있어 타격이 있다”며 “예전엔 원-달러 환율이 내리면 원-유로 환율 등이 올라 환율 효과를 상쇄해 줬지만 최근엔 원화만 유독 강세를 보여 더욱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화학 및 정유업계도 원화 강세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원재료인 원유를 수입할 때는 달러로 결제하기 때문에 환율이 내리면 일시적으로 도움이 되지만 부가가치를 높여 되파는 과정에서 더 큰 손해를 본다. 전체 매출의 60∼70%를 수출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기업은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의 내수경기 부진으로 수요마저 줄어 울상이다. 이에 증권사들은 잇달아 관련 기업들의 2분기 영업이익 추정치를 하향 조정하고 있다.
이 밖에 조선·기계, 반도체 등도 환율 하락의 민감도가 큰 업종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는 올해 원-달러 환율이 1000원으로 하락할 경우 전기·전자(―2.1%포인트), 자동차(―2.7%포인트), 기계(―1.9%포인트), 조선(―5.0%포인트) 업종 등의 영업이익률이 전년보다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 현재 환율, 우리 경제가 감당할 수 있나
산업계에 따르면 국내 수출기업들이 생각하는 적정 환율은 달러당 1070∼1090원, 손익분기점 환율은 1040∼1050원 선으로 추산된다. 현재 환율이 1010원 안팎인 것을 감안하면 벌써 이들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마지노선의 밑으로 한참 내려갔다는 뜻이다. 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장은 “지금 환율 수준은 한국 경제가 지탱할 수 있는 균형 환율 수준보다 100원 이상 낮다”며 “수출을 할수록 손해 보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세 자릿수 환율이 임박하면서 산업계는 물론이고 금융시장에서도 불안 요인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직전에도 환율이 900원대로 낮게 유지되다가 갑자기 급등하면서 경제위기가 촉발됐다. 사상 최대 규모인 경상수지 흑자도 수출과 수입이 동시에 부진해 발생한 ‘불황형 흑자’란 점에서 원화 강세로 수출이 타격을 받으면 경상수지가 순식간에 적자로 돌아설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현재 환율이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신관호 고려대 교수는 “지금은 단기외채 비중 등 경제지표가 외환위기, 금융위기 때보다 좋아져서 환율 하락만으로 금융부문의 위기가 커질 가능성은 줄었다”며 “그러나 환율 하락의 속도가 너무 빠르면 대응할 여유가 없어지는 만큼 조절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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