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짧은 전성시대를 보냈던 PDP TV가 LCD TV에 왕좌를 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①PDP TV 전성기에는 전자업체들이 3차원(3D) 영상을 구현하는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②1973년 서울 리라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브라운관 TV를 시청하고 있다. ③‘2007 한국전자전’에서 공개된 삼성전자의 세계 최대 203cm LED LCD TV.
어릴 적 추억으로 남은 ‘배불뚝이’ 브라운관 TV는 1990년대 후반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TV가 세상에 등장하면서 자취를 감췄다.
PDP TV는 이른바 ‘평판 TV’로 불리며 세계의 거실 문화를 바꿔 놨다. 폭이 60cm는 족히 넘던 브라운관 TV와 달리 두께가 획기적으로 줄면서 TV의 디자인적 가치가 몰라보게 커졌기 때문이다.
브라운관 TV는 TV 뒤쪽 전자총에서 쏜 전자가 TV 앞쪽 유리에 칠해진 형광물질을 때리면서 화면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폭이 넓어야 한다. 하지만 PDP는 TV 화면 유리판 사이에 형광물질을 넣은 뒤 고압의 전기를 흘려 넣으면 나타나는 ‘기체방전(플라스마)’ 현상을 이용하기 때문에 두께를 줄이기가 쉽다.
무엇보다도 벽에 걸 수 있는 ‘벽걸이 TV’가 등장한 데 대해 사람들은 환호했다. 거실 한복판을 넓게 차지하던 TV 받침대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거실을 한층 넓게 쓰게 됐다. TV가 단순한 가전제품이 아닌 인테리어 소품으로 거듭난 시점이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PDP TV가 과거 브라운관 TV가 그랬듯이, 화려했던 시절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다. PDP TV에 사활을 걸었던 일본 업체들이 줄줄이 사업을 접은 데 이어 세계 1, 2위를 차지해 온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신제품 수를 줄이고 있다. 이달 1일 삼성SDI도 PDP 사업을 연내 종료한다고 공식 발표함에 따라 올해를 기점으로 PDP TV 시대는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오래 못 간 PDP 전성시대
PDP TV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과 한국 업체들 간 치열한 기술 경쟁 속에서 전성시대를 맞았다. ‘40인치 이상 대형 TV로는 PDP 패널이 최선’이라는 당시 업계의 판단 속에 기술은 급속하게 발전했고 가격도 떨어졌다.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면서 2002년 하반기(7∼12월)부터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2002년 47만 대이던 수요는 2003년 93만 대, 2004년 184만 대, 2005년 342만 대로 연평균 93.8%씩 성장했다.
PDP TV는 저렴한 가격과 얇은 두께, 대형 사이즈를 앞세워 빠르게 시장점유율을 늘려 나갔지만 단점도 적지 않았다. 전기방전을 이용한 방식이라 전력 소비가 많고 발열이 심하다. 열을 식히기 위해 팬을 돌려야 하기 때문에 소음 문제도 있다. 같은 화면을 계속 띄울 경우 제조 당시 들어간 불순물이 타서 흔적을 남기는 ‘번인(burn-in)’ 현상이 나타난다.
그 빈틈을 액정표시장치(LCD) TV가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2000년대 중반부터다. 본래 10∼20인치대 컴퓨터 모니터용으로 개발됐던 LCD는 TV 패널 뒤쪽에 있는 광원(光源)이 빛을 내 액정을 통과하며 화면을 만드는 방식이다. LCD는 사실 1990년대 말 PDP와 함께 시장에 등장했지만 상대적으로 비싸고 대형화가 어렵다는 단점 때문에 초기 경쟁에서 PDP에 밀렸다.
하지만 TV 제조사들이 LCD 기술 개발에 투자를 시작하면서 시장의 판도는 서서히 바뀌어 갔다. PDP냐, LCD냐를 둘러싼 논쟁이 불붙고 PDP의 전성시대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업계 관계자는 “공정상 40인치 아래의 작은 사이즈를 구현하기 어려운 PDP와 달리 LCD는 1인치부터 100인치까지 다양한 사이즈로 만들 수 있다”며 “마침 휴대전화와 태블릿PC 등 전자업계의 새로운 ‘캐시카우’가 등장한 것도 범용성이 뛰어난 LCD가 PDP를 누르고 시장을 재편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게임의 법칙’에서 이긴 LCD
무엇보다 전자업계의 ‘큰손’ 삼성전자가 PDP가 아닌 LCD를 주력 사업으로 선택한 것이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업계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삼성전자는 당시 LCD를 차세대 먹거리로 정하고 반도체로 번 돈을 LCD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LCD는 라인을 짓는 데 대규모 비용이 드는 사업이라 기술보다는 투자로 인한 진입장벽이 높다. 규모의 경제를 동원할 수 있는 삼성전자가 LCD 사업에 ‘다걸기(올인)’하면서 세계 디스플레이 업계가 재편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2003년 일본 소니와 손잡고 LCD 생산을 전담하는 합작사(S-LCD)를 세워 TV 및 디스플레이 업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LCD 패널 1위 업체인 삼성전자와 TV 세트 부문에서 수십 년간 1위를 해 온 소니, 양대 거물이 손을 잡으면서 사실상 업계의 표준을 PDP에서 LCD로 바꾼 것이다.
당시만 해도 시장조사기관들은 40인치대 LCD TV 시장 수요가 2006년은 돼야 180만 대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소니와 삼성전자가 손을 잡자 그해 양사의 물량만 합해도 시장 전망치를 5배 이상 초과해 버렸다. 팽팽했던 PDP와 LCD 간 힘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대만과 중국 등의 디스플레이 후발 주자들도 자연스레 PDP가 아닌 LCD 기술 경쟁에 뛰어들었다. 플레이어가 늘자 LCD의 기술 발전에는 가속도가 붙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PDP가 LCD에 비해 기술적으로 떨어져서 경쟁에서 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업체들 간 업계 표준을 둘러싼 치열한 눈치싸움 끝에 이미 메이저 업체들이 많이 몰린 LCD 쪽으로 무게추가 기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계 표준이 반드시 기술 우위에 의해서만 정해지는 건 아니란 의미다. 1970년대 소니가 밀었던 ‘베타맥스’와 마쓰시타의 ‘VHS’ 방식이 치열한 접전 끝에 업계 표준을 먼저 장악한 VHS 방식이 이긴 것과 같은 현상이다.
결국 2000년대 중반 들어 PDP와 LCD TV의 가격은 거의 같아졌다. 2010년을 기점으로는 LCD TV가 더 저렴해지는 가격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LCD는 대형화의 한계 역시 극복해 100인치대 제품까지 나왔다. 백라이트로 발광다이오드(LED)를 쓰면서 제품 두께도 더 얇아졌고 화면도 PDP보다 밝다는 평가가 나온다.
LCD가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면서 글로벌 PDP TV 수요는 매년 빠르게 감소했다. 시장조사업체 디스플레이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1030만 대 규모이던 PDP TV 시장은 올해 540만 대로 반 토막 난 데 이어 내년에는 180만 대, 2016년에는 40만 대 등으로 급감할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 관계자는 “PDP의 최대 장점이었던 가격 경쟁력이 사라지면서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며 “여기에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신형 디스플레이가 나오면서 PDP의 퇴조는 앞당겨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파나소닉 등 日 업체들 눈물 흘린 이유
PDP TV의 몰락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글로벌 TV 시장의 패권이 이동하는 계기가 됐다. PDP 기술력을 앞세워 압도적인 점유율로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일본 TV 업체들이 LCD 기술력을 앞세운 삼성과 LG 등 한국 업체들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파나소닉이 대표적인 사례다. 파나소닉은 2006년 일본 오사카(大阪) 시에서 주주총회를 열고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투자를 발표했다. 2100억 엔을 투자해 일본 효고(兵庫) 현 아마가사키(尼崎) 시에 PDP 공장을 증축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PDP 세계 1위를 달리던 파나소닉의 지나친 자신감이었다. 이미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LCD TV로 시장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었지만 이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공장이 완공된 2010년에는 이미 LCD가 대세가 된 뒤였다. 결국 파나소닉은 최근 2년간 TV 사업에서만 150억 달러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한때 PDP TV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하던 다른 일본 업체들도 모두 시장에서 손을 뗐다. PDP 기술력을 인정받던 파이오니아는 2009년에 일찌감치 사업을 접었고 도시바도 지난해부터 신제품을 내놓지 않고 있다.
반면 같은 시기 한국 업체들은 LCD TV로 사업 중심을 빠르게 전환하며 일본 업체들을 누르고 글로벌 TV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올라섰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삼성과 LG도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PDP냐, LCD냐를 두고 한솥밥을 먹는 그룹 계열사끼리 집안싸움을 벌이는 일이 이어졌다.
삼성그룹의 경우 브라운관에 이어 PDP를 생산해 온 삼성SDI와 업계 1위로 LCD 진영을 대변해 온 삼성전자가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삼성SDI와 삼성전자는 서로 PDP와 LCD 화질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하며 상호 공개적으로 공격하기 일쑤였다.
LG 역시 같은 이유로 LG전자와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 간 내부 갈등을 겪었다. 삼성과 반대로 LG는 LG전자가 PDP를, LG필립스LCD가 LCD를 맡아 생산했다. 2003년 구본준 당시 LG필립스LCD 사장이 “LCD와 PDP가 경쟁하면 LCD TV가 백전백승한다고 본다”고 말한 것이 알려지면서 PDP를 차세대 핵심사업으로 육성하려고 총력을 쏟아온 LG전자가 상당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10여 년 새 시장 주도권이 LCD로 넘어가면서 삼성SDI와 LG전자는 PDP 사업을 점차 줄여왔다. 최근 사업 철수를 발표한 삼성SDI는 기존 PDP 사업 인력을 순차적으로 에너지솔루션 사업부로 이동시킬 계획이다. 경북 구미의 A1, A2, A3라인에서 PDP 패널 및 모듈을 개발해 온 LG전자 역시 2007년 A1에 이어 2012년 A2 라인을 중단하고 현재는 A3라인에서만 PDP 패널을 생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2018년을 기점으로 OLED TV가 본격적인 대중화 궤도에 오르면 PDP TV는 완전히 자취를 감출 것으로 보고 있다. LCD 역시 자연스레 줄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업계 관계자는 “배불뚝이 TV에서 평판 TV로 한 차례 대전환이 일어났다면 2차 대전환은 LCD에서 OLED로의 이동이 될 것”이라며 “아직은 OLED TV가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아 대중화되기 어려운 상태이지만 2018년이면 가격 경쟁력을 충분히 갖출 것”이라고 했다. 당분간은 초고화질(UHD)을 앞세운 LCD TV가 대세로 이어지겠지만 결국 차세대 TV 시장 흐름은 LCD와는 또 다른 새로운 방식의 OLED로 옮겨갈 것이란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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