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에서는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이란 표현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국제금융 1번지 런던은 전문직종 종사자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노동자들의 도시다. 런던에서 ‘이주민’ ‘외국인’이란 말은 마치 ‘외계인’과 동의어 같은 느낌이다. 자국 국적이 아닌 사람을 일컬을 때는 ‘인터내셔널(국제적)’이라고 한다. 국제도시 런던에서 ‘국제’라는 단어는 ‘인적, 물적 근원이 자국(自國) 밖으로부터 공급된 것’을 의미한다. 더이상 미화하지도 않고 불편해하지도 않는다.
미국 포브스지는 세계 58개 도시를 대상으로 각종 잣대를 대어 측정한 결과 런던을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로 꼽았다. 해외로부터 유치한 직접 투자의 규모, 주요 기업체의 진출 여부, 타 주요 도시와의 연계 용이성, 금융, 회계 등 서비스 산업의 발전도와 민족적 다양성이 주요 가늠자였다.
런던에는 270개 민족이 300여 개의 다른 언어로 소통하며 일하고 있다. 그야말로 노동자들의 유엔인 셈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런던 시민은 구성원의 절반을 조금 넘을 뿐이다. 주식, 채권 시장의 펀드매니저를 만나거나 식당 웨이터, 병원 간호사의 서비스를 받을 때 상대방이 영국인 또는 유럽인이 아닌 경우가 다반사다. 런던 중심에 위치한 고급 호텔 포시즌의 종업원 450명은 60개국에서 선발됐다.
국제도시 런던은 거대 다국적 기업이 본사를 런던에 두고 글로벌 경영을 주도하도록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세계 500대 기업의 75%가 런던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구글은 실리콘밸리에 있는 본사 다음으로 큰 조직을 런던에 뒀다. 세계 최대의 금융 정보 통신사인 블룸버그도 유럽 본사를 런던에 두고 세계 각국에서 인재 7000명을 모집 중이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인 아마존도 유럽 본사가 런던에 있다.
런던은 유럽 금융위기를 거치며 국제금융 허브 위치를 잠시 뉴욕 맨해튼에 넘겼다가 최근 재탈환했다. 영국은 지난해 금융 서비스 분야에서 710억 달러(약 72조 원)의 무역흑자를 기록하며 2위 미국을 2배 이상 앞질렀다. 이는 금융 섹터별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50개 은행이 런던에 거점을 두고 있다. 세계 외환 거래의 45%가 이곳에서 이뤄진다. 미국 달러는 미국보다 런던에서 두 배, 유로화는 유로 국가보다 런던에서 두 배 더 많이 거래되고 있다. 런던 주식시장에는 뉴욕증권거래소나 나스닥보다 더 많은 500개 이상의 외국 기업이 상장돼 있다.
런던이 국제금융 1번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금융 인프라, 안정적인 법률·회계 서비스, 글로벌 시장 접근에 유리한 시차적 위치, 국제 공통어 영어 사용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런던 금융가의 풍속도가 달라졌다. 여름에 장기 휴가를 가거나 금요일 점심식사를 하면서 술 한잔하다가 그 참에 퇴근하는 관습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이 그렇듯 일과에서 ‘근면성실’이 주요 근무수칙이 됐다.
2008년 프랑스 2대 은행인 소시에테제네랄의 트레이더가 70억 달러(약 7조1400억 원) 규모의 금융사고를 내 이 은행을 파산 국면까지 몰고 갔을 때의 이야기다. 프랑스 감독당국은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가 사고 원인인 것으로 파악했다. “저는 사무실에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오전 9시에 업무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오후에는 5시까지 책상에 앉아 있어야 했고 점심시간은 고작 1시간 반밖에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트레이더의 변명이었다. 이 사건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런던의 금융인들에게는 반면교사가 됐다. 이른 새벽 런던 도심으로 연결되는 지하철엔 피부 색깔, 인종, 민족이 다른 사람들이 신문을 읽거나 블랙베리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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