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랜드 계열사 중 패션사업을 담당하는 ‘이랜드월드’는 업무 특성상 야근이 많은 편이었다. 디자이너와 공장관리자의 야근은 필수로 여겨졌을 정도였다. 게다가 최근 중국 등 해외 진출이 확대되면서 마케팅 담당 부서까지 업무량이 많아졌다. 이 때문에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이랜드월드’는 ‘일랜드 월드’”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구성원 중 누구도 이런 말을 안한다. 이랜드월드 전 사옥은 오후 6시가 되면 무조건 불을 끈다. “제발 야근 좀 그만하고 싶다”던 직원들의 입에선 “야근 한번 하려면 윗사람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저녁을 돌려주겠다’는 최고경영자(CEO)의 방침에 따라 이랜드월드가 강제로 야근 줄이기에 나선 결과다. 》 ○ “불 꺼!”
인사기획팀 김보혈 대리는 매일 오후 5시 40분이면 이랜드월드 전 사옥을 샅샅이 누빈다. 김 대리가 등장하면 사무실도 분주해진다. 오후 6시에는 모든 사무실이 불을 완전히 꺼야 하는 규정이 있고, 김 대리가 소등 여부를 일일이 체크하는 감독관이기 때문이다.
이랜드월드가 ‘6시 완전 소등제’를 실시한 것은 올해 1월부터다. 몇 해 전부터 이랜드월드는 야근을 최소화하고, 정시퇴근문화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야근을 밥 먹듯 하는 디자인팀 등 일부 부서는 정시퇴근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데다 부장이나 차장 등 간부들이 자리를 지킬 때가 많아 후배들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회사는 오후 6시에는 무조건 불을 끈다는 강제규정을 만들었다. 야근을 필히 해야 하는 부서는 오후 4시 30분까지 야근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신청서를 내지 않고 하는 야근은 ‘불법’이다. 각 팀은 한 달간 사용할 수 있는 ‘야근 쿠폰’ 한도 내에서만 야근을 해야 한다. 대략 한 사람이 한 달에 3일 정도 쓸 수 있다. 각 팀의 정시퇴근 여부는 부서장의 인사고과에도 반영된다. 야근 신청서를 내지 않고 몰래 야근을 하다가 적발된 건수가 많을수록 부서장의 평가 점수가 깎인다.
○ 오히려 업무 효율은 향상
‘정시 소등제’를 실시한 뒤 직원들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잡화생산부에서 일하는 유미란 대리(29)는 올해 상반기부터 요가를 배우고 있다. 회사 근처 상가에 있는 요가센터에 가서 일주일에 세 번씩 몸을 풀고 오는 게 일상이 됐다. 주 3일 이상 야근을 했던 지난해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유 대리의 업무는 중국 내 수요를 파악해 각 공장의 생산과정을 관리하는 것. 물건을 만들어 넘겨야 하다 보니 납기일이 항상 말썽이었다. 공장에서 납기일을 맞추지 못하거나 중국에서 예상치 못한 요구사항이 들어오면 꼼짝없이 야근을 해야 했다. 매일 야근을 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느덧 야근이 습관이 돼 버렸다. 오후 6시 일을 마치면 동료들과 7시까지 저녁을 먹고, 사무실에서 1∼2시간 더 일하다 가는 것이다.
유 대리는 “처음엔 일이 많아서 야근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막상 강제소등에 맞춰 퇴근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야근을 굳이 안 해도 일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조윤주 대리(34)는 아이들에게 저녁밥을 챙겨준 적이 거의 없다. ‘키즈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어 수요조사, 미팅으로 하루 일정이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야근을 해야 눈치가 덜 보이기 때문에 미팅을 저녁시간으로 잡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강제소등제 시행 이후 조 대리는 미팅을 되도록 낮 시간에 잡으려고 노력한다. 외근할 때도 회사로 돌아와 야근 행렬에 동참하던 관행도 없애고 외근지에서 퇴근하는 습관을 들였다. 두 아이와의 시간은 자연스레 늘어났다. 조 대리는 “결혼 초부터 경력 단절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12개월도 채 안 된 아이들을 남의 손에 맡긴 게 아쉬웠다”면서 “이젠 매 저녁을 아이들과 함께 하며 미안함을 씻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 남겨진 숙제는?
올해 1, 2분기 강제소등제 시행 결과 6시 정시 퇴근율은 지난해 41%에서 76%로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지난해보다 오히려 20% 정도 늘었다.
하지만 아직도 사내에선 강제소등제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다. 디자인을 하거나, 시차가 큰 해외 지사와 일을 해야 하는 팀은 “업무 특성도 고려하지 않고 근무시간만 줄여놓으면 성과가 떨어진다”고 불만이다.
‘야근은 필수’라는 인식을 가진 직원도 상당수 남아 있다. 20년 차 직원 A 씨는 “총감독자인 나는 정시퇴근이 어렵다”면서 “‘내가 막내였을 땐 일하는 선배를 두고 먼저 가버리진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마학준 이랜드월드 인사기획팀 과장은 “부서별 특성을 고려해 야근 쿠폰 발급을 늘리는 등 제도를 조정할 계획”이라며 “정기적인 업무재설계를 통해 소모적인 일처리 단계를 줄여 야근을 최소화하는 작업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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