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죠 뭐….” “요즘 우리 경제 어떤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많은 전문가는 일단 한숨부터 내쉬며 이렇게 말한다.
“세월호 영향은 극복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무 회복 속도가 느려요.” “지표는 좋아지는 것 같은데 체감경기는 아직 안 좋죠.”
“국민들은 이제 지갑을 서서히 여는 것 같은데 수출이 잘 안 됩니다.” 전반적으로 한국 경제가 뭔가 돌파구를 못 찾은 채 헤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답답하다’보다는 ‘갑갑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장래를 낙관하기엔 도처에
발목을 잡는 요인이 너무 많다. 비관론으로 치면 요즘엔 관료들이 더하다. 안종범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우리 경제를
“초미지급(焦眉之急·눈썹이 탈 만큼 위급한 상태)”이라고 했고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경제의 맥박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고 표현했다. 희망을 말하기는커녕 아예 절망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한국 경제를 살릴 ‘골든타임’이 지금 이
시간에도 조용하지만 긴박하게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말하면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남아있다는 의미다. 지표가
나아진다는 것은 어찌됐건 경기 사이클이 바닥을 다지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추석을 맞아 대형마트에는 카트 굴리는 소리가
유난히 세게 들리고 일련의 정부 대책들 덕분인지 오랜만에 부동산 등 자산 시장도 들썩이고 있다. 몇 달 전 한 외국계 은행은 한국
경제를 ‘물이 반쯤 들어있는 유리잔’에 비유한 바 있다. 위기와 기회,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항상 병존(竝存)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경제가 과연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전망은 어떤지 부문별로 진단해 본다.》 ○ 실물경제는 여전히 잿빛
지금 한국 경제는 ‘소프트 패치(Soft Patch·회복 국면의 일시적 침체)’에 빠져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분기별로 보면 전(前) 분기 대비 0%대 저성장을 이어가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지난해 3분기(7∼9월)에 1.1%까지 올랐지만 올 2분기(4∼6월)에 그 절반도 안 되는 0.5%로 고꾸라졌다.
한국 경제는 작년 말에 비로소 회복의 싹이 트나 했더니 올해 초 엔화 약세와 미국 경기의 침체로 비틀거렸고, 2분기에는 세월호 참사로 예기치 못한 ‘카운터펀치’를 맞았다. 비록 그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고는 있지만 회복세가 충분치 않은 양상이다.
경기 회복이 예상보다 더뎌지면서 일각에서는 소프트 패치를 넘어 ‘더블딥(Double Dip)’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경기가 회복 경로에서 완전히 이탈해 다시 긴 침체 국면에 접어들 수 있다는 뜻이다. 내수와 투자 부진이 장기화되면서 이번 경기침체가 세월호 참사 등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이런 우려의 배경이다.
실제로 정부가 파악하는 여러 통계를 보면 이걸 ‘회복’이라고 말해야 할지 주저해야 할 정도로 많은 지표가 ‘옆걸음질’을 치고 있다. 우선 추석 경기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 최근 중소기업중앙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추석에 자금 사정이 곤란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작년에 43.6%였지만 올해는 47.2%로 올랐다. 근로자에게 추석상여금을 지급한 중소기업 비중도 73.6%로 작년(74.2%)보다 소폭 떨어졌다.
특히 한국은행의 제조업 기업경기실사지수(BSI)를 보면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기업수익성의 양극화가 두드러지게 관찰된다. 향후 경기에 대한 전망치가 대기업 내수기업은 개선 또는 현상유지를 하는 반면 중소·수출기업은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화 강세와 글로벌 경기 불안이 수출로 먹고사는 중소기업의 체감경기를 잔뜩 얼어붙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수출이 잘돼야 기업수익이 좋아져 가계소득과 투자 증가로 이어질 텐데 수출이 부진한 게 지금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고민”이라고 말했다.
물론 일부 지표는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는 모습도 보인다. 산업 생산이 2개월 연속 증가하면서 공장 돌아가는 소리가 커지고 있고, 취업자도 1년 전보다 50만 명 이상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기업들의 생산은 증가폭이 아직 너무 미약하고 취업자는 저임금·고령 일자리를 중심으로 늘 뿐 금융회사 등 소위 ‘질 좋은’ 일자리는 구조조정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물가상승률이 근 2년째 1%대를 유지하면서 일본이 20여 년째 겪고 있는 장기 침체의 낌새를 풍기는 것도 문제다. 김병환 기재부 경제분석과장은 “세월호 참사 이후 침체됐던 경기가 올라오고는 있는데 속도가 느리다”며 “물가상승률도 너무 낮아서 국민들이 회복세를 체감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 오랜만에 들썩이는 자산 시장, 리스크도 많아
실물경기가 잿빛인 데 반해 투자 시장은 사뭇 다른 분위기다. 모처럼 생기가 돌고 맥박이 빨라지고 있다. 자산 시장이 오랜만에 꿈틀대는 것은 무엇보다 최경환 경제팀의 시장 활성화 대책에 힘입은 바가 크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부동산 시장은 요즘 모처럼 아파트 거래량이 늘고 가격도 올라가고 있다. 지난달 서울지역의 아파트 거래량은 1년 전의 딱 두 배로 늘었다. 보통 7, 8월은 장마와 여름 휴가철로 거래 비수기에 해당하지만 올해만큼은 예외다. 아파트 매매가 역시 7월 넷째 주 이후 6주 연속 상승세고 시간이 흐르면서 오름폭이 더 커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서울은 강남 서초 송파구 등 이른바 ‘강남 3구’, 그중에서도 재건축단지가 아파트 가격 상승을 이끌었다. 중산층과 고소득층의 자산효과(wealth effect·자산가치가 올라가면 이에 따라 소비가 늘어난다는 뜻)를 노려봄 직하다.
주식 시장에도 온기가 돌고 있다. 정부의 배당 확대 정책과 기준금리 인하에 따라 주식의 매력이 상대적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일단 투자자들이 주식 시장을 다시 기웃거리면서 증시 주변에 ‘돈냄새’가 나고 있다. 증권사가 투자자에게 빌려준 돈인 신용융자잔액은 연초 4조 원대 초반 수준이다가 하반기 들어 증가하기 시작해 2일 현재 5조2297억 원까지 늘었다. 고객들이 주식 투자를 위해 증권사에 맡긴 예탁금도 3월 말 13조6298억 원에서 2일 현재 15조3702억 원으로 증가했다.
투자 시장의 상승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일단 부동산 시장에서는 전세 살던 사람들이 내 집 마련에 나서는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간 전세가가 워낙 올라 집값과 크게 다르지 않은 데다 초저금리로 매매 자금을 부담 없이 은행에서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증시 전문가들도 일단 내년 초까지 지수의 완만한 상승 흐름을 기대하고 있다.
다만 정부 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점차 희석되는 시점이 오면 양상은 달라질 수 있다. 증시는 기업이익이 한계에 부닥치면 다시 회복세가 주춤할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시장도 마찬가지다. 김규정 우리투자증권 부동산연구위원은 “실질적 내수 회복, 가계소득 증가, 경제성장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장기적인 부동산 경기 활황은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반적인 경기 회복 없이 정부 정책에만 의존한다면 ‘반짝 활기’에 그칠 것이라는 뜻이다. 아랫목(실물)은 차고 윗목(시장)만 뜨거운 ‘두 얼굴의 경제’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게 경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연말까지 길게 놓고 본다면 글로벌 경제의 변수도 눈여겨봐야 한다. 미국의 조기 금리 인상 가능성, 원화 강세와 엔화 약세, 중국 경제의 경착륙 등 지뢰가 도처에 깔려 있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향후 한국 경제를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 요인이 아직 상당히 많다”며 “우리 경제가 더블딥으로 악화될 가능성을 막기 위해 정책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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