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공장이 즐비한 1973년 구로공단의 모습(왼쪽 사진)과 벤처기업이 들어선 지식산업센터와 아파트형 공장이 즐비한 최근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모습(오른쪽 사진)이 대비된다. 구로공단은 1964년 9월 14일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이 제정되면서 생긴 한국 최초의 국가산업단지로 최근 50주년을 맞았다. 한국산업단지공단 제공
열다섯 되던 해인 1978년. 서울 구로공단 3단지의 동남전기㈜에 취직했을 때 그는 ‘스테레오과 생산부 A라인 1번’으로 불렸다. 트랜지스터라디오와 TV를 만들던 공장에서 공중에 매달린 에어드라이버를 당겨 합성수지판에 나사를 박는 게 1번의 일이었다. 중학교만 마치고 전북 정읍군(현 정읍시) 고향집을 떠나 상경한 ‘여공’ 신경숙의 이야기다.
신 씨는 자전적 소설 ‘외딴 방’에서 쪽방이 다닥다닥 이어진 ‘벌집촌’을 이렇게 묘사했다. “서른일곱 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 앳된 여공들은 발만 간신히 뻗을 수 있는 방에서 서글픈 잠을 자며 밤낮 없이 일했다.
한국 최초의 국가산업단지인 구로공단(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이 최근 50주년을 맞았다. 구로공단은 한국 경제와 사회의 변천사가 압축된 공간이다.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 가발 봉제 완구 등 저임금 제조업에서 정보통신기술(ICT) 기반 첨단산업에 이르는 한국 경제의 성장,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땀과 눈물을 오롯이 담고 있다.
○ 구로공단의 탄생
“서울 근교에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지역을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재일교포들의 재산과 기술을 들여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1964년 일본을 돌아보고 온 이원만 한국나이론공업협회장(코오롱 창업주)이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수출만이 살 길’이라며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을 추진하던 때였다. 곧바로 박정희 정부는 자본력을 가진 재일교포를 유치하기 위해 산업단지 조성에 착수했다. 그해 9월 14일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이 제정됐고 이듬해인 1965년 3월 서울 구로동 45만2900m² 터에 구로공단의 첫 삽이 떠졌다.
구로동은 서울 변두리 중의 변두리였다. 당시 구로공단에 입주했던 양지사의 이배구 회장은 ‘구로공단에서 G밸리로’란 책에서 “사람들이 ‘서울시내에서 그렇게 먼데 거기서 어떻게 공장을 하느냐’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입주 희망 기업이 늘며 공단은 빠르게 커졌다. 1968년 2단지, 1973년 3단지가 차례로 준공돼 197만9700m²에 이르는 구로공단이 완성됐다.
○ 수출의 첨병, 이를 떠받친 근로자의 눈물
당시 한국은 자본과 기술력이 없었던 터라 구로공단은 주로 가발, 봉제, 전자조립 등 값싼 노동력을 쓰는 경공업이 주를 이뤘다. 이런 공단을 떠받치는 힘은 근로자, 특히 여공이었다. ‘오빠, 남동생은 학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부모의 뜻에 따라 중학교만 마친 15, 16세 소녀들이 공단으로 밀려왔다. 낮밤 근무조가 한 팀이 돼 월급의 절반인 월세 3만 원짜리 ‘2부제 셋방’을 나눠 썼다. 라면으로 보통 끼니를 때운다는 뜻의 ‘라보때’란 말이 유행했고 각성제 ‘타이밍’으로 졸음을 쫓으며 새벽까지 재봉질을 했다.
1978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자기인형 수출업체에 취업한 박혜정 씨(51·여)는 인천교대생 오빠의 학비를 댔다. 석고가루로 인형을 만들고 천으로 닦는 일이었다. 박 씨는 “당시 프랑스 등으로 수출이 잘돼 공장이 3개나 됐다”면서 “하루 종일 먼지 날리는 공장에서 일하다 보니 기관지가 나빠져 지금도 천식으로 고생한다”고 했다.
구로공단 수출액은 1971년에 1억 달러를 돌파했다. 기업과 근로자가 빠르게 늘어 1978년에는 204개 업체에서 11만4360명이 일했다.
싼 인건비에 하루 14∼16시간씩 일하다 보니 병에 시달리지 않는 근로자가 드물었다. 공단 입주업체 노조들은 1985년 6월 한국 최초로 동맹파업을 벌였다. 오일쇼크에 따른 수출 침체와 임금 상승 등이 겹쳐 업체들도 해외나 지방으로 떠났다. 1999년 구로공단의 고용 인원은 2만9639명으로 쪼그라들었다. ○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변신
2000년 9월 ‘키콕스벤처센터’가 입주하면서 구로공단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또는 G밸리)라 불리는 ICT 첨단밸리로 새로 태어났다. 구로공단의 상징이던 굴뚝은 자취를 감췄고 푸른 작업복이 물결치던 출근길 풍경은 젊은 직장인과 연구원의 캐주얼 차림으로 바뀌었다.
높은 임대료로 몸살을 앓던 서울 강남 테헤란로 일대의 벤처기업이 속속 옮겨왔다. 2013년 말 현재 107개 지식산업센터에 1만1911개사, 16만2000여 명이 일하는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됐다. 41년째 구로공단을 지켜온 성호전자 박환우 대표(59)는 1970년 전남 강진에서 상경한 ‘공돌이’에서 이제 ‘사장님’이 됐다. 박 대표는 “구로공단은 항상 그 시대 한국 경제가 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구로공단을 비롯해 20년 이상 된 노후 산업단지를 ‘스마트 혁신단지’로 발전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