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대비 일본 엔화의 가치가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 약 3년 전인 2011년 10월 월평균 원-엔 환율은 100엔당 1499원이었지만 22일 현재 956원으로 그동안 36%가 하락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향후 1∼2년 안에 700원대 환율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전문가도 등장했다.
글로벌 경제가 놓인 환경을 봐도 엔화 약세의 큰 흐름을 되돌릴 만한 요인은 찾기 힘들다. 오랜 저성장의 터널에 갇힌 국제사회가 일본의 디플레이션 탈출을 응원하고 있다. 이에 비해 엔저의 파장을 경계하는 한국의 목소리는 미약하다. 수출 비중이 높은 국내 기업과 일본 기업의 명암은 벌써부터 엇갈리고 있다.
○ 번번이 한국경제 위기로 빠뜨린 엔저
엔화 약세는 지금까지 고비 때마다 갈길 바쁜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반대로 엔화값이 치솟으면 한국은 그에 따른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렸다.
한국이 엔고의 덕을 본 대표적인 사례는 1980년대 후반의 3저 호황이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글로벌 외환시장에서 엔화가치가 올라가자 주요 수출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하던 한국은 경제성장률이 기록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런 국면은 1988∼1990년의 ‘1차 엔저’로 곧 막을 내렸다.
엔화 약세로 인한 본격적인 피해는 1997년과 2008년에 현실화됐다. 1995년 4월∼1997년 2월(2차 엔저) 중 엔화 대비 원화가치가 30% 올라가면서 경상수지 적자폭이 큰 폭으로 불어났고 이는 1997년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됐다. 또 2004년 초부터 2007년 중반까지 이어진 ‘3차 엔저’ 역시 국내 은행들의 외화유동성을 악화시킨 빌미로 작용했다.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국내 외환시장의 변동성을 크게 키웠다.
한국은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 수출이 28% 급증하면서 다시 한 번 엔화 강세의 수혜를 입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2012년 일본이 아베노믹스를 앞세워 금융시장에 ‘엔화 살포’를 시작하면서 한국 수출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해 한국의 수출증가율은 마이너스(―1.3%)로 돌아섰고 작년과 올해 모두 2%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장은 “이제 일본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엔화 약세를 반영해 해외에 파는 달러표시 가격을 낮추고 있다”며 “일본의 반격으로 우리 수출이 타격을 입으면 1997년, 2008년의 위기가 재연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 국제사회도 엔저에 우호적
최근 원-엔 환율이 급락 추세를 보이는 것은 미국이 조기 금리 인상을 시사하면서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는 데 반해 일본은 기존의 ‘돈 풀기’ 기조를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경상수지 흑자가 여전히 크고 펀더멘털이 양호하다고 평가를 받기 때문에 원화가치의 하락 속도가 상대적으로 더디다. 문제는 이 같은 흐름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지난 주말 호주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일본은 사실상 아베노믹스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번 회의에서 G20은 “세계경제의 수요가 취약하다”며 “선진국 중앙은행은 디플레이션 압력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 원엔 환율 1% 내리면… 국내수출 0.92% 감소 ▼
상황이 급박해지자 한국의 당국자들도 우려 섞인 발언을 공개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이달 기자간담회 및 국회 세미나 자리에서 잇달아 엔화 약세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한은 총재가 민감한 환율 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도 “일본이 추가 양적완화에 나서면 한국의 수출경쟁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 일본 기업 가격 공세 강화
산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원엔 환율이 1% 하락하면 국내 기업의 수출은 약 0.92% 감소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중소기업도 전반적으로 피해를 본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올해 원-엔 환율은 손익분기점(1059원 선)을 이미 한참 밑돌고 있다.
대기업 가운데는 자동차 업종의 영향이 가장 크다. 미국에서 일본차와 직접적인 경쟁을 벌이는 현대·기아차는 엔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원화 강세로 올 2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13% 감소한 반면 도요타는 엔저의 수혜로 같은 기간 영업이익이 7년 만에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도요타는 엔저가 본격화된 작년 하반기 미국시장에서 모델당 평균 2500달러의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등 가격 공세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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