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사과상자를 가득 실은 손수레를 가게 안으로 힘차게 밀고 들어왔다. 시장 입구부터 뛰다시피 움직인 터였다.
최창락 씨(27)는 상자를 가게 창고에 하나씩 옮겨 쌓고 난 후에야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고, 검은색 티셔츠는 이미 반쯤 젖어 있었다. 다시 수레를 밀고 나가는 그의 숨소리는 거칠었지만 그래도 신이 나 보였다. 최 씨는 과일 가게와 생과일주스 가게를 동시에 여는 아이디어로 ‘청년상인 성공이야기 만들기’ 오디션을 통과한 사람이다. 이달 경기 광명시장에서 개업할 예정. 주스 가게 아이디어는 과일 가게에서 팔다 남거나 멍이 들어 상품성이 떨어지는 과일을 처리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
최 씨는 3일 경기 시흥시 삼미시장의 ‘오빠네 과일가게’(동아일보 8월 12일자 A16면 참조)에서 일일 점원 체험을 했다. 가게 일손을 도우면서 연매출 50억 원 신화를 일군 동갑내기 김건우 사장(27)으로부터 장사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6개월간 시장조사를 하고, 과일 선별법을 배우는 등 창업 준비를 해왔으나 직접 장사를 해본 적이 없어 고민하던 차였다. 최 씨의 점원 체험은 경기전통시장지원센터에서 주선했다. ○ 과일은 생물(生物), 빨리 파는 게 남는 장사
“지금이 마지막, 골라 골라, 한 바구니 5000원!”
‘오빠네 과일가게’에는 5000원이 넘는 과일은 보이지 않는다. 사과 5개 5000원, 귤 한 바구니 5000원 등으로 대형마트뿐만 아니라 시장 안에서도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정말 싸다’ 싶을 정도로 과일이 바구니마다 듬뿍 담겨 있다. 전형적인 박리다매형 가게다.
“과일은 생물(生物)이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상품성이 떨어지니까 싸게라도 빨리 파는 게 결국은 남는 장사가 돼요. 옷이나 휴대전화처럼 쌓아놓고 팔 수 없으니까요.”(김)
“장사 경험 없이 시작하려니 요즘 잠이 안 옵니다.”(최)
“과일 가게 옆 생과일주스 가게처럼 청년들은 아이디어가 번뜩이죠. 하지만 노하우가 부족해 20∼30년 장사하신 분들을 따라잡기 힘들어요. 그러니까 새로운 과일이 나오면 먼저 공부하고, 손님 대하는 일도 직원들한테만 맡기지 말고 직접 하면서 배워야 합니다. 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거죠. 내 돈 들어가면 금세 일을 배우게 되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허허.”(김)
최 씨의 가장 큰 고민은 초기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좌판에 과일을 진열하기 좋은 가로로 넓은 가게가 아니라, 월세가 싼 세로로 기다란 가게를 구했다. 게다가 생과일주스 가게 인테리어도 아직 만족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우리 가게 봤죠? 시장은 시장다워야 해요. 시장에 세련된 카페가 들어서면 잘될 것 같나요? 손님들은 백화점이 아니라 시장에 온 겁니다.”(김)
김 사장의 말을 꼼꼼히 필기하는 최 씨의 손이 빨라졌다.
“장사는 파는 사람, 살 사람, 물건 세 가지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과일 장사는 가게만 열면 추가로 들 돈이 없습니다. 비닐봉지 정도죠. 초기 자본이 충분하면 왜 과일 장사를 합니까, 다른 장사를 하지. 욕심내지 말고 작게 시작해야지 처음부터 으리으리하게 시작하는 건 잘못된 겁니다. 한 박스 팔다가 어떻게 하면 두 박스 팔 수 있을까 방법을 찾다보면 노하우가 쌓여요.”(김)
○ 최씨 “月 매출 1억 넘으면 다시 찾아뵐게요”
“대학 친구의 아버지가 과수원을 하셔서 그분으로부터 과일을 공급받으려고 합니다. 다른 상품은 안산도매시장에서 사오려고 하고요.”(최)
하지만 아는 곳에서 과일을 공급받으면 믿을 만할 것이라는 최 씨의 생각은 김 사장의 지적을 피할 수 없었다.
“직접 도매시장으로 가세요. 친구 아버지한테는 사과, 배 품질이 안 좋더라도 항의할 수도, 반품할 수도 없지 않나요? 운임도 생각해 보시고요. 그리고 안산보다는 가락이나 강서 같은 1차 도매시장으로 가세요. 가게에서 가까운 도매시장일수록 마진이 한 번 더 붙는다는 걸 잊으면 안 돼요.”(김)
도매시장에서는 과일 하나씩 맛보고 사면 풋내기 취급받기 쉽다. 사과만 해도 종류가 20가지가 넘는다. 김 사장은 “사람이 돈을 벌어준다”면서 “한두 번 속아준다는 마음으로 도매상인과 사귀어 보라”고 권했다.
이들은 왜 전통시장에서 청년창업을 꿈꾸게 됐을까. 동갑내기인 최 씨와 김 사장의 인생에는 닮은 점이 많다. 각각 태권도 선수, 농구·당구 선수였다가 운동을 그만뒀다는 점, 한 번 마음먹으면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닮았다.
“바나나를 하루에 100박스, 그러니까 8000송이 팔고 펑펑 운 적이 있어요. 시장에 오는 모든 손님이 한 번씩은 다 먹은 셈이었으니까요. 성공해도 울고, 실패해도 울면서 여기까지 왔네요. 젊으니까 배우면서 성장할 수 있어요. 조급해하지 말고 도전해 보세요.”(김)
“2월부터 새벽마다 도매시장에 가서 과일도 먹어보고 가격도 알아봤어요. 경기도내에서 안 가본 시장이 없고요. 저도 청년 사장으로 성공하고 싶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월 매출이 1억 원을 넘어서면 제일 먼저 찾아뵐게요.”(최)
▼ 전통시장은 청년일자리 블루오션… 창업 적극 나서야 ▼
젊음을 무기로 서비스 차별화… 자신의 사업과 시장이 함께 번창
“청년상인들이 전통시장의 변화를 이끌고 있습니다. 전통시장은 대형마트를 상대할 경쟁력을 갖추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얻는 선순환이 만들어질 겁니다.”
동아일보와 채널A,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경기도가 함께하는 ‘청년상인 성공이야기 만들기’ 사업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박근균 경기전통시장지원센터 팀장. 그는 “전통시장은 청년 일자리의 블루오션”이라며 적극적인 창업을 권했다.
전통시장에서는 영어 점수나 학력이 아니라 청년이라는 것만으로도 스펙이 된다. 2012년 기준으로 경기도 전통시장 상인의 평균 연령은 53.3세. 전국 평균보다 1.7세 정도 낮지만 상인들의 고령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전통시장에 ‘젊은 피 수혈’이 시급한 이유다.
박 팀장은 “기업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려면 비슷한 또래끼리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전통시장에서는 젊음 자체가 커다란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청년 특유의 참신한 아이디어와 차별화된 상품, 친절한 서비스까지 갖추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최근에는 장사에 뛰어든 청년들의 열정이 알려지면서 그들 자신의 사업이 번창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장 전체가 활성화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서울 종로구 금천교시장의 ‘열정감자’, 경기 하남시 신장시장의 ‘시루본’, 경기 시흥시 삼미시장의 ‘오빠네 과일가게’ 등은 중소기업 못지않은 매출을 올리는 청년상인들의 성공 스토리로 유명해졌다. 동시에 이 가게들이 들어선 전통시장을 찾는 손님도 덩달아 늘어났다.
전통시장의 희소성이 다시 평가받고 있는 지금이 창업의 적기라는 의견도 많다. 전통시장 수가 줄어들면서 보존가치가 높아지고 시장이 관광지로서의 역할까지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통시장에서는 정년 없이 오래 일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취재 중 만난 청년상인들은 “장사를 하면 노후 걱정이 없다. 정년을 걱정하는 친구들을 보면 선택에 후회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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