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부터 경영전문대학원(MBA)을 다니기 시작한 유빛내리 씨(34)는 1학기 강의 때는 매번 지각을 했다. 빨라야 오후 6시 퇴근이라 7시부터 시작하는 강의시간에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 늘 수업 시작 30분이 지나서야 강의실에 도착했고, 앉을 자리를 찾아갈 때도 까치발이었다.
하지만 9월에 개강한 2학기부터는 그럴 일이 없어졌다. 퇴근시간이 오후 5시로 빨라졌기 때문이다. 퇴근시간을 한 시간 앞당길 수 있었던 것은 유 씨가 다니는 회사인 온라인 교육 전문기업 ‘휴넷’이 8월부터 탄력근무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휴넷의 기존 근무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 회사는 여기에다 오전 8시∼오후 5시, 오전 10시∼오후 7시 근무제를 새로 만들어 직원들이 셋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직원들이 자신의 사정에 맞춰 아침, 저녁시간을 활용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에서다.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유 씨는 대학원 수업을 위해 한 시간 일찍 출근해 한 시간 빨리 퇴근하는 오전 8시∼오후 5시 근무를 택했다.
학점은행팀의 한희정 수석(41)은 출퇴근을 한 시간씩 늦춘 오전 10시∼오후 7시 근무를 선택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과 1학년인 딸을 둔 한 수석은 탄력근무제가 도입되기 전까지 두 아이의 등교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오전 7시 20분쯤 집을 나서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전 8시 20분쯤 두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집을 나서 학교 앞까지 데려다 준 뒤 회사로 향한다. 한 수석은 “딸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등교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며 “아침에 잠을 깨우느라 아이들과 씨름하셨던 시어머님의 수고도 덜어드리게 돼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고 탄력근무제 도입을 누구보다 반겼다. 한 수석은 또 “출근하면서 러시아워에 시달리지 않으니 회사에 도착해서 업무에 바로 몰입하기가 한결 나아졌다”고 말했다.
휴넷 직원들은 다른 회사를 다니는 친구나 선후배들로부터 특히 부러움을 사는 것이 있다. 입사 후 5년간 계속 근무하면 한 달간 휴가를 갈 수 있는 학습휴가제도다. 학습휴가는 한 달을 통째로 쉬어도 급여가 지급되는 유급 휴가다. 학습휴가라고는 하지만 휴가기간에 뭔가를 꼭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휴가 중에 보고 느낀 것을 휴가가 끝나고 돌아와 말이나 글로 회사 동료들에게 전하면 된다.
학습휴가는 교육 전문기업인 만큼 직원들도 휴가 중에 새로운 경험을 통해 뭔가를 얻고 배울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도입한 장기 휴가제도다. 일이 몰려 학습휴가를 가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한 달간의 긴 휴가로 일에 차질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면 회사는 단기 대체 인력을 채용해 빈자리를 메워준다. 상사 눈치를 보느라 학습휴가 신청을 머뭇거리는 직원도 없다. 학습휴가는 휴넷이 창립 당시 취업규약에 명문화해 자격만 되면 누구나, 언제든지 갈 수 있다.
1999년 회사가 생긴 뒤로 2004년에 첫 학습휴가자가 나왔고 지금까지 전체 정규직 164명 중 60명가량이 학습휴가를 한 번 이상 다녀왔다. 학습휴가는 5년마다 갈 수 있어 올해로 입사 15년 차인 한 수석은 학습휴가를 3번이나 다녀왔다.
임미연 고객행복센터장(34)은 학습휴가 덕분에 다섯 살 된 아들과 모처럼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주중에는 인천에 사는 친정어머니에게 아들을 맡겨 주말에만 아들 얼굴을 봐온 임 센터장은 6월 학습휴가를 내고 아들과 제주도로 가 3주일을 함께 지냈다. 임 센터장의 남편이 다니는 직장에는 한 달씩 쉴 수 있는 휴가제도가 없어 남편은 주말을 이용해 제주도에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임 센터장은 “모든 걸 잊고 한 달을 쉬어 보니 일주일 정도의 휴식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컸다”며 “학습휴가가 끝난 뒤에는 몸이 확실히 재충전됐다는 느낌을 갖고 회사로 복귀해 업무 효율도 훨씬 높았다”고 말했다.
2008년 입사한 기업교육서비스팀의 이승현 선임(35)은 지난해 1월 학습휴가를 내고 한 달 간 인도와 태국 여행을 다녀왔다. 자신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이 선임은 “휴가에서 돌아와 보니 일이 좀 쌓여 있긴 했지만 여행에서 얻은 에너지로 힘든 줄도 모르고 일했다”며 “휴가 후 첫 출근하는 날에는 신입사원 같은 기분이 들면서 의욕도 넘쳤다”고 말했다.
휴넷의 금요일은 한 시간 일찍 시작해 한 시간 빨리 끝나는 ‘얼리버드 데이’다. 휴넷은 2006년 11월부터 금요일마다 모든 직원이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한다. 직원들은 매주 금요일 오전 8시부터 한 시간 동안 외부 초청 강사의 특강을 듣는다. 지금까지 329차례 진행된 특강에는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명지대 교수와 ‘시골 의사’ 박경철 원장 등이 강사로 참여했다.
휴넷은 일부 직원 사이에 ‘금요일마다 오전 8시에 출근하는 것이 버겁다’는 의견이 있어 출퇴근 시간을 30분씩 늦추는 방안을 놓고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결과는 전체 직원의 80% 정도가 오전 8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을 유지하는 쪽을 원했다. 문주희 HR팀장(37)은 “직원 대부분은 금요일 오후 근무를 한 시간 빨리 마무리하고 그만큼 먼저 주말 분위기를 맞고 싶어 하는 것 같다”며 “상사 눈치를 보지 않고 주말을 낀 금토일, 토일월 휴무를 사용하는 직원도 많다”고 말했다.
▼“푹 쉬어야 몰입… 창의적 아이디어도 쏙쏙”▼
‘학습휴가제’ 도입 이인숙 대표
“근무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얼마나 몰입해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이인숙 휴넷 대표이사(50·사진)는 24일 다른 회사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장기 휴가인 학습휴가제 도입 이유를 묻자
‘몰입도’ 얘기를 꺼냈다. 맡은 분야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성과를 내려면 짧은 시간을 일해도 몰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적절한 시기에 재충전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이 대표이사는 “교수들처럼 1년씩 안식휴가를 주고 하면 더 좋겠지만 기업의 특성상 그렇게까지 하기는 힘들다”면서 “그래도 한 달 정도면 충분히 머리를 식히면서 새로운 경험을 해 볼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이사는 “학습휴가제 실시 초기에는 부작용도 있었다”고 말했다. 학습휴가를 떠나 한 달을 쉬고 와서는 바로 사표를 내는
직원들이 있었다는 것. 그래도 이 대표이사는 학습휴가제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장기적으로
내다봤을 때 학습휴가는 반드시 정착시켜야 할 제도라고 여겼다.
이 대표이사는 “우리 회사는 교육을 통해 사람들을
성장시키는 것으로 매출을 내는 회사”라며 “그런 회사가 직원들에게 성장을 위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이사는 한 달간의 장기휴가를 직원들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학습휴가를 앞둔 직원들에게 가능하면 계획적으로 시간을 보낼 것을 주문한다.
이 대표이사는 “학습휴가를 떠나기
직전과 갔다 온 뒤에 직원들이 일을 더 열심히 한다”며 “이제는 학습휴가제가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고 말했다. 학습휴가를 다녀온
직원들은 자신이 없는 동안 고생한 팀 동료들을 위해 일을 더 열심히 한다는 게 이 대표이사의 얘기다. 이 대표이사는 또
“학습휴가를 떠나는 직원을 보면서 남아 있는 동료들은 언젠가는 나도 한 달간의 휴가를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면서
“학습휴가는 회사 전체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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