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경기 부천시 소사구 경인로의 역곡남부시장. ‘옛날 홍두깨 손칼국수’ 가게 안에서 하얀색 조리복을 입은 젊은이가 어른 몸통만 한 도마 앞에 섰다. 그는 미리 준비한 하얀 반죽을 커다란 홍두깨로 힘차게 눌러 펴기 시작했다. 이어 펴진 반죽에 밀가루를 뿌리고는 직사각형 모양의 큰 식칼로 반죽을 솜씨 좋게 잘라냈다. 어느새 하얀 칼국수 면이 완성됐다.
반대편에는 맑은 빛깔의 멸치육수가 커다란 냄비에서 끓고 있었다. 청년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남은 반죽을 이용해 수제비를 만들어냈다. 손으로 떼어낸 밀가루 반죽이 육수 속에 빠질 때마다 퐁당퐁당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그는 칼국수 면과 양파 호박 당근을 추가로 넣고, 큰 나무젓가락으로 냄비 속을 휘휘 저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바지락이 수북이 담긴 큰 국수그릇. 3분이 다 됐음을 알리는 스톱워치가 울리자 청년은 끓여낸 면과 수제비를 그대로 그릇 위에 부어냈다. 그 위에 채 썬 대파와 김, 깨를 올리자 맛있는 바지락 칼국수가 완성됐다.
칼국수는 누가 봐도 1인분 치고는 많은 양이었다. 정이 듬뿍 담긴 ‘시장표 음식’ 그대로였다. 시장에 있는 보통 칼국숫집과 다른 점은 두 가지. 요리를 내온 사장이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청년 이호준 씨(25)라는 점, 그리고 바지락 칼국수의 가격이 4000원밖에 안 된다는 점이었다.
○ 많아도 잘되는 칼국수 가게 보고 무릎 탁
“처음에는 호텔이 너무 좋아 보였죠.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사업, 내 가게’를 하고 싶었어요. 이 씨는 수원의 한 대학 호텔조리학과를 졸업한 뒤, 2010년 동안 서울의 호텔에서 주방 인턴사원으로 일했다. 1년 동안이었다. 그는 한식당과 중식당을 겸한 호텔 음식점에서 하루 종일 양파를 까는 등 허드렛일을 도맡아했다. 종일 끓는 기름 앞에서 탕수육을 튀기고 나면 그 열기에 팔뚝의 잔털이 다 타 없어진 적도 있었다. 이 씨는 “사람들에게 요리를 선보이는 과정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배운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창업 생각뿐이었다. 처음에는 피자나 파스타 같은 것을 파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이탈리아 요릿집
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장조사를 해 보니 이미 비슷한 가게가 너무 많았다. 창업 자금도 변변치 않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고민이 깊어질 즈음, 전북 고창군에서 30년 넘게 칼국수 식당을 한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이 씨의 외할머니는 당시 몸이 좋지 않아 일을 쉬면서 그의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는 ‘전통시장’과 ‘칼국수’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 매료됐다.
“칼국수는 굉장히 재미있는 사업 아이템이었어요. 길에서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는 너무나 평범한 음식인데도 사람들이 계속 붐비는 가게가 많았어요. 신기했죠.”
그는 외할머니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호탕한 성격의 외할머니는 육수 제조 비법, 반죽 숙성법 같은 ‘방법론’부터 ‘시장 칼국수는 양이 많아야 사랑받는다’ ‘손님들에게는 가격을 깎아 주는 것보다 뭐라도 더 얹어 주는 게 좋다’ 같은 ‘전통시장 경영론’까지 전수했다. 이 씨는 여기에 자신만의 비법을 더했다. 우선 만들어져 나오는 식품회사 국수(건면) 대신 직접 만든 생면을 쓰기로 했다. 생면을 쓰면 면을 그때그때 끓여내야 해 번거롭지만 맛을 생각하면 건면을 사서 쓰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수분 함량이 높은 생면은 건면에 비해 면발이 부드럽고 쫄깃하거든요. 생면 칼국수를 연구하려고 대전에 있는 유명한 집 칼국수를 먹으러 가기도 했어요.”
이 씨는 반년간의 연구 끝에 만족할 만한 반죽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 지난해 6월 역곡남부시장에 가게를 열었다.
○ 평범한 이름 대신 자신만의 브랜드 준비
그의 가게의 콘셉트는 확실하다. 바로 ‘싸게, 맛있게, 그리고 푸짐하게’다.
지난달 29일 오전 9시경 찾은 가게에는 60대 주민 2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들은 “오전 느지막이 일터로 나가기 전 ‘속풀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 즈음인 오전 11시가 넘자 이번에는 초등학생 3명이 가게를 찾았다. “수업이 오전에 끝나 집에 가다가 출출해서 들렀다”고 했다. 이렇게 팔려나가는 국수가 하루에 100그릇이 넘는다.
손님들이 이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가게를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저렴한 가격 때문이다. 이 씨의 가게에서 가장 싼 잔치국수는 한 그릇에 2000원이다. 손칼국수는 3000원, 바지락칼국수는 4000원, 제일 비싼 팥 칼국수도 5000원밖에 하지 않는다. 보통 상가 가격의 절반 수준이다.
하지만 양은 큰 대접에 한 가득일 정도로 푸짐하다. 이 씨는 “싸고 양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 시장표 국수의 철칙”이라며 “마진이 적더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도움이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리다매를 위해 이 씨는 가게를 꾸밀 때부터 비용을 최소화했다. 26m²(약 8평)가 채 안되는 가게에는 단출하게 테이블 7개만 놓여 있다. 원래 꽃집이었던 가게를 칼국수 집으로 재단장하는 데는 약 3000만 원이 들었다.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작업은 이 씨가 직접 했다.
냉장고 그릇 수저 등 위생과 관련된 중요한 조리용품은 새것으로 하되, 가능하면 중고 제품을 최대한 활용했다. 테이블 상판은 새것을 쓰지만 다리는 중고를 이용하는 식이었다. ‘무료’로 제공되는 밥을 짓는 밥솥은 이 씨가 자취하던 시절 쓰던 것이다.
인건비도 최소화했다. 손님들이 몰리는 오후 12∼2시에는 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를 두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혼자서 모든 일을 한다. 젊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이 씨는 “가끔은 어르신들이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왜 사장님 대신 아르바이트생이 국수를 만드냐’고 묻기도 한다”며 웃었다.
이 씨는 요즘 가게 간판을 바꾸려 준비하고 있다. ‘홍두깨 손칼국수’라는 평범한 이름 대신에 자신만의 ‘브랜드’를 내세우기 위해서다. 매운 맛을 내주는 ‘얼큰 칼국수’도 개발 중이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손님들이 “면이 참 맛있다”고 칭찬할 때다.
“요즘엔 오전 7시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일합니다. 호텔에 출퇴근할 때보다 더 바쁘죠. 하지만 ‘내 가게’라고 생각하면 힘든 줄을 모르겠어요. 이곳에서 성공을 거둔 후 다른 사람들에게 기술을 전수해 2호점, 3호점도 만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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