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기피하면 낙오… 핀테크가 한국 금융계 마지막 기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3일 03시 00분


[‘핀테크’ 금융혁명이 온다]<7·끝> 전문가 진단과 조언

“우리나라 은행들은 핀테크 같은 혁신을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 피곤한 거 안 해도 정부가 알아서 밥벌이를 보장해 주거든요. 선진국에선 금융회사들이 미래를 내다보고 핀테크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마당인데….”

최근 동아일보 취재팀이 만난 핀테크 기업의 대표, 벤처업계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세계적 금융혁명에서 한국이 뒤처지는 가장 큰 이유로 국내 금융권의 구조적 문제를 꼽았다. ‘금융시장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금융회사들을 온실 속에 넣어 과보호하고, 새로운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막아온 정부의 정책 기조가 금융권의 만성적 ‘혁신 기피증’을 낳았다는 것이다. 경제 전문가들의 견해도 비슷하다. 기존 금융회사들이 마음껏 금융혁명에 동참하도록 족쇄를 풀어주는 것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신기술로 무장한 새로운 ‘플레이어’들을 자꾸 링에 올려보내 금융업계의 자발적 변화와 퇴출을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전문가들은 경제 규모에 비해 뒤떨어진 한국 금융시장에 핀테크 혁명은 도약을 위한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 높은 진입장벽-규제 오남용이 혁신 걸림돌

한국 경제발전사(史)의 대부분의 기간에 금융업은 산업 육성의 수단 정도로 인식돼 왔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발전의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들어 국책은행들이 하나둘씩 민간에 넘어가고 금리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자율적 혁신을 위한 기반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 무렵 자본시장이 외국에 개방되면서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하던 금융사들이 해외 선진금융과 접점을 늘릴 계기가 마련됐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의 은행들은 다시 옛날로 되돌아갔다. ‘은행도 망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자 다소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경쟁과 혁신보다 남들이 다 해본 안전한 것만 찾게 된 것이다. 은행들이 수익의 대부분을 예대마진에 의존하고 담보대출을 통한 몸집 불리기에만 급급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권혁세 전 금융감독원장은 “외환위기 이후 ‘혹시나 사고 날까’, ‘정보 유출이나 부실 대출이 나올까’ 무서워서 금융계에서 도전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지금 중국 알리바바가 금융업에 나서는 걸 보면 거대한 실험을 하는 셈인데, 우리만 옛날 틀 속에 머무르고 안주하니 되는 게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분위기에는 정부도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 많다. 과도한 경쟁을 막는다는 이유로 금융업에 진입장벽을 치고 이들의 현실 안주를 사실상 방조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92년 평화은행 설립 이후 22년 동안 국내에서 새로 문을 연 은행은 한 곳도 없다. 이 기간 중 미국 영국 일본 등에서 인터넷전문은행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금융사의 진입, 퇴출이 빈번하게 이뤄져 진화를 거듭한 것과 큰 대조를 이룬다.

관치(官治) 금융과 규제의 오·남용도 결과적으로 핀테크 같은 혁신을 막은 주범으로 꼽힌다.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금융사의 지배구조가 흔들리는 마당에 긴 안목을 갖고 금융혁명이라는 시대의 조류에 대비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또 스마트금융을 육성하기 위해 규제를 완화했다가 정보 유출 사태가 터지면 보안규정을 다시 강화하는 등 정책의 일관성이 흔들린 것도 핀테크 발전을 가로막은 요인으로 거론한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오늘의 합법이 내일은 불법이 될 만큼 규제의 예측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는 장기적인 경영계획을 세우거나 혁신을 한다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 “은행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금융계의 원로들은 지금 국내 금융업이 처해 있는 상황이 매우 절박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산업 간 융복합, 신(新)금융기업들의 약진 등 외부의 변화 속도는 엄청나게 빠른데, 이에 대처하는 국내 은행과 금융당국의 자세는 느슨하다는 것이다. 핀테크를 지원하는 정부 조직은 최근에야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 문제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도 금융당국과 미래창조과학부, 중소기업청 등으로 분산돼 있다. 금산분리처럼 핀테크 육성을 위해 보완이 필요한 핵심 규제들은 정치적 논란 때문에 정부가 감히 거론조차 못 하는 분위기다.

전광우 연세대 석좌교수(전 금융위원장)는 “금융과 정보기술(IT)의 융합이라는 대단한 변혁의 시기를 겪고 있는데 어찌 보면 이게 우리 금융계의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며 “다행히 정보통신 부문은 우리가 경쟁력이 있으니 이를 이용해 금융이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핀테크 혁명을 계기로 은행업계의 보수적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은 “금융·유통·통신이 융합되면서 이 혁명이 어디까지 갈지 예측하기조차 힘들다”며 “우리 은행들은 자기 영역을 지키는 데 급급해 수동적으로만 나오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석헌 숭실대 교수는 “금융계에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무장한 새로운 세력이 오랫동안 나오지 않으면서 결과적으로 발전이 지체된 면이 있다”며 “핀테크 혁명을 계기로 우리 금융업의 진입장벽에 대한 논의가 다시 전개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팀장=신치영 경제부 차장 higgledy@donga.com
팀원=유재동 정임수 김재영 신민기 송충현 박민우 경제부 기자
#핀테크#은행#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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