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부장이 사라졌다. 며칠째 퇴근시간만 되면 소리 없이 사무실을 나선다. 어디를 향해 그리 바삐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제는 참치횟집에서, 어제는 한우구이집에서 모 임원에게 ‘인사 민원’을 했다는 소문만 무성하다.
‘새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사내 메신저의 알림창이 하루 종일 깜빡인다. 메시지의 내용은 둘 중 하나다. “어디로 간대?” “누가 온대?”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메신저를 이용한 사내 ‘탐문’ 활동은 왕성해진다.
다음 달이면 각 회사의 연말 인사시즌이 시작된다. 인사철에 사무실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직장인들이 뿜어내는 욕망과 불안, 좌절, 아부가 사무실 공기와 범벅이 된다. 인사철에만 확인할 수 있는 회사 내 다양한 군상의 모습을 정리해 봤다.
○ 내 성과는 내가 알린다
“민석 씨, 쉬엄쉬엄 일해. 잘생긴 얼굴 상할라.” 한 통신기기 제조업체. 오후 업무로 한창 분주한 김민석(29·가명) 씨 옆으로 팀장이 슬쩍 오더니 말을 걸었다. 김 씨는 평소 데면데면하던 팀장의 농을 듣자마자 직감적으로 느꼈다. 인트라넷의 사내 공지를 확인하기 전이었다. ‘상향 인사평가(후배가 선배를 평가) 기간이구나!’
김 씨의 팀장은 상향 인사평가 기간만 되면 갑자기 후배들을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업무 중 틈만 나면 후배들 책상 옆을 기웃거리거나 난데없이 가족들은 잘 있느냐며 ‘호구조사’를 벌인다. 인사팀에 동기가 있어서 누가 자신에게 나쁜 평가를 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뒷말도 무성하다. 그래서 김 씨를 포함한 다른 팀원들은 팀장의 이중적인 모습을 알면서도 좋은 평가를 줄 수밖에 없다.
인사철 즈음해서 좋은 고과를 받기 위해 ‘막판 스퍼트’를 올리는 직장인들도 있다. 출판업체에서 일하는 지상은(36·가명) 씨는 다년간의 직장생활 끝에 따뜻한 인사철을 보낼 수 있는 비법을 찾았다. 평가 기간이 시작되기 한 달 전부터 야근을 자청하는 것이다.
지 씨는 11월이 되면 한두 시간씩이라도 꼭 야근을 한다. 정 할 일이 없을 때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낮에 작성한 기획안에 오탈자가 있는지 확인한다. 지 씨보다 먼저 사무실을 나서는 부장이 어깨를 툭 치며 “고생이 많아”라고 말하는 건 좋은 고과를 기대하게 하는 신호다. ○ 인사철 ‘을’은 힘이 없다
조직을 이끄는 인사권자들에게 직원들을 평가하는 권한은 가장 강력한 힘이다. 반면 인사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인사철의 ‘을’들은 인사권자들의 힘이 두렵다. 혹여 그들의 눈에 어긋나 고과에서 낮은 평가를 받으면 조직 내의 커리어가 꼬여 버릴 수 있다.
인사권자의 개인감정은 고과에 얼마나 영향을 줄까. 취업포털 ‘사람인’이 기업 인사담당자 55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명 중 1명은 ‘인사평가 시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킨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개인적인 감정의 89%는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감정적인 평가를 한 이유로는 ‘후배가 평소 마음에 들지 않는 언행을 해서’가 가장 많았다.
또 기혼 여직원들은 남자 직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충을 인사철에 겪는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임신할 예정이거나 임신 중인 여직원은 여전히 인사철의 약자다.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박미연(28·가명) 씨는 작년 인사 때 새로 이동한 부서에서 곤욕을 치렀다. 직전 부서 부장이 박 씨를 새 부서로 보내면서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신한 여직원은 최소 120일의 출산휴가를 쓸 수 있다. 대체인력을 받기 어렵다는 이유로 직전 부장이 임신한 박 씨를 아예 다른 부서로 이동시킨 것이다. 새로 옮긴 부서 사람들은 나중에야 박 씨의 임신 사실을 알고 난감해했다.
박 씨는 “임신한 사실이 알려져 다른 부서에서 나를 받지 않으면 공중에 붕 떴다가 비인기 부서로 갈 확률이 높다”며 “새 부서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배신자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인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임신 사실을 솔직히 말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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