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이공계 위기론이 한국 사회를 흔들더니 이번엔 인문계 위기론이다. 취업 시장의 돌아가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 경영학과를 제외한 나머지 인문 계열, 특히 문사철(文史哲)로 불리는 순수 인문학도들은 취업 지원서를 낼 곳조차 찾기 힘들 정도다.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의 올해 하반기 대졸 신입사원 합격자 가운데 이공계 출신 비중은 85%다. 구체적인 숫자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15%의 비이공계 출신 가운데 대부분은 상경계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자동차는 인문계는 공채 대상에서 제외하고 수시 채용으로 돌렸다. 금융권에서도 채용 공고에 ‘이공계 우대’를 명시하는 곳이 나오고 있다.
최고경영자(CEO)들의 면면을 봐도 점차 이공계 강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CXO연구소가 국내 1000대 기업 대표이사 111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이공계 출신이 506명으로 45.3%, 비이공계 출신이 554명으로 49.6%, 기타가 56명으로 5.0%였다. 아직은 근소하게 비이공계 출신이 많지만 경영학과(231명)와 경제학과(78명)만 해도 절반이 넘는다. 문사철은 영문학과(15명)를 제외하면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최근까지도 공학과 인문학을 결합한 ‘스티브 잡스형’ 인재가 화두였다. 채용 시험에서도 인문학적 소양을 묻는 질문이 강화됐다. 하지만 기업은 정작 인문계 출신을 반기지 않는다. 도대체 이런 상황은 무엇인가.
최근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실린 세계 100대 CEO 가운데 공학 계열 학사 이상 소지자는 24명이었다. 특히 내부 승진이 아니라 외부에서 영입된 CEO는 공대 출신이 많았다. 이에 대해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니틴 노리아 학장은 “공학은 무엇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다루는 학문이다. 공학을 공부하면 기계든 조직이든 실제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정신 상태가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공대 출신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는 뜻이다.
채용 과정에서도 유사한 기준이 적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인문계를 뽑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 대기업 임원은 “경기가 안 좋아 몇 명 뽑지도 않는데 곧바로 쓸 수 없는 지원자는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인사 업무를 담당했던 조선업계의 임원은 “인문계 출신은 입사한 뒤에 용어 자체를 못 알아듣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대기업들이 채용 기준을 변경하면서 사회 전반에 후폭풍이 불가피해졌다. 취업이 안 된다니 대학에선 인문계열 학과들이 통폐합되거나 없어지고 고등학교에선 인문계 지원자가 줄어들 것이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자녀를 둔 대부분 학부모들도 문과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지 않을까.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다. 1980년대 중반 문과와 이과를 놓고 고민할 때 부친은 문과를 추천했다. “이과는 남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문과 출신이다”라는 식의 설명이었다. 그땐 그랬다.
‘문청(文靑·문학청년) 같다’는 말이 칭찬이던 시절도 있었다. 그만큼 때 묻지 않고 순수하다는 뜻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젠 그래서 취직이나 하겠냐, 밥벌이나 제대로 하겠냐는 뜻으로 들릴 것 같다.
위기의 기업들에 창의적인 인재를 강조하더니 문사철은 왜 외면하느냐고 물을 수는 없다. 그래도 가슴 한구석엔 여전히 씁쓸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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