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생은) 머리로는 잊고 몸으로만 기억해두면 되는 거야. (중략) 말을 하면 언제까지나 못 잊는 법이다. 말을 안 하면 잊어버리지. 그러니까 별것 아닌 고생담은 떠벌리지 않는 게 곧 자신을 위하는 길이야.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아사다 지로 지음·문학동네·2013년) 》
시대의 변혁기를 사는 사람들은 참 고달프다.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집 속의 이와이 고로지는 메이지(明治) 유신으로 근대화 물결에 휩쓸린 1800년대 후반 일본의 사무라이다. 막부 체제의 근간이었던 무사들은 하루아침에 ‘백수’ 신세가 됐다.
무사 시대가 몰락하면서 상급 무사 가문의 노인 고로지는 사무라이들을 ‘정리 해고’하는 고통스러운 임무를 맡는다. 주어진 임무를 완수한 고로지는 결국 자신의 가문마저 정리하고 마지막 핏줄인 어린 손자와 함께 죽을 곳을 찾아 떠난다.
이미 지나버린 세월에 사로잡혀 새 세상의 문턱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의 모습은 ‘웃프다(웃기면서도 슬프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아름답다. 이들이 고집스럽게 품고 있던 것이 빛바랜 과거의 영광도, 낡은 가치관도 아닌 스스로에 대한 ‘긍지’였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도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아버지의 ‘자긍심’에 관한 이야기다. 극 중 배우 황정민이 연기한 아버지 덕수는 평생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희생한 자신의 삶에 긍지를 가지고 있다. 덕수는 70대 노인이 돼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내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로 힘들었거든예….”
겪어보지 못한 이야기지만 젊은이들은 아버지 덕수의 서글픈 삶을 공감하고 있다. 사실 기성세대들의 고생담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만약 덕수가 여느 기성세대들처럼 “아들아, 이 정도면 먹고살 만한 거다. 옛날이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며 자조하는 젊은이들에게 ‘꼰대’(나이 든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 소리를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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