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기업경영에 ‘레드팀’을 許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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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수 산업부 차장
김상수 산업부 차장
‘뉴스룸’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영화 ‘소셜네트워크’와 ‘머니볼’의 각본을 쓴 에런 소킨이 제작한 드라마로 미국 영화채널 HBO에서 2012년부터 시작해 지난해 ‘시즌3’까지 방영됐다. 가상 케이블 뉴스 채널인 ACN보도국을 중심으로 ‘9·11테러’ ‘오사마 빈라덴의 죽음’ ‘보스턴 마라톤 테러’ 등 굵직한 사건·사고를 다루는 언론인의 고민과 사명 등을 다뤘다. 국내에서도 ‘뉴스룸 폐인’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이 드라마의 열렬한 시청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필자의 눈길을 끈 건 이 ACN 보도국에서 운영한 ‘레드팀’이라는 검증 조직이다. ‘시즌2’에서 보도국은 “해외 파병 미군이 납치된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 생화학무기인 ‘사린가스’(독가스의 일종)를 마을에 사용했다”는 충격적인 제보를 접한다. 보도국 기자들은 8개월여간의 취재와 검증을 끝낸 뒤 같은 뉴스 제작팀 일원인 레드팀에 이 내용을 털어놓는다.

ACN 보도국에서 레드팀을 운영하는 목적은 단 하나다. 새로운 시각에서 팩트(Fact·사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필요해서다. 레드팀은 평소에는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뉴스 제작 동료들이다. 하지만 큰 특종거리가 생겼을 때 보도국은 일부러 몇 명을 철저히 이 뉴스 취재에서 제외시킨다. 그러곤 보도 직전에 이들에게 특종을 오픈한다. 레드팀은 이 뉴스를 다루는 게 맞는지, 도덕적인 문제는 없는지, 뉴스의 완결성에 허점은 없는지를 솔직하게 얘기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ACN 보도국 간판뉴스인 ‘뉴스나이트’의 앵커인 윌 매커보이와 제작진은 레드팀이 부정적인 의견을 냈음에도 몇몇 잘못된 증언을 바탕으로 “미군이 사린가스를 사용했다”는 초대형 오보를 내 신뢰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된다.

사실 레드팀 운영은 언론사에만 필요한 건 아니다. 기업에서도 주요 사안을 놓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쓴소리’를 하거나 이슈를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이들이 필요하다. 볼펜을 예로 들어보자. 앞면과 뒷면, 옆면 등 어디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생긴 모습이 다 다르다. 오랫동안 한 곳에서만 바라본 사람들은 그게 볼펜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쪽에서 바라보면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주요 사안을 오랫동안 다루다 보면 전문성은 뛰어나지만 이슈에 함몰되기 쉽고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한쪽 방향으로만 달려가기 때문에 잘못된 의사결정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때 “당신들은 중요한 포인트를 놓쳤다”고 ‘적색경보’를 울려주는 게 바로 레드팀의 역할이다.

우리 대기업들은 외국에 비해 레드팀을 운영하기 어려운 구조로 돼 있다. 오너 일가가 전권을 쥐고 핵심적인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감히 오너의 심기를 거스르는 발언을 했다가는 ‘불경죄’에 걸리기 십상이다. 정주영 이건희 회장처럼 탁월한 리더가 방향을 설정하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가 성공한 케이스도 있지만 반대로 인수합병(M&A)이나 대규모 투자 등 주요 의사결정에서 경영진이 독단적인 리더십을 발휘해 망한 사례도 많다.

국내 기업에는 레드팀 같은 조직이 거의 없다. ‘컴플라이언스(준법경영)팀’이 회사가 경영프로세스 전반에서 각종 법과 규정을 잘 알고 지켰는지 정도를 체크할 뿐이다. 레드팀과 같은 역할을 하라고 사외이사를 뒀지만 이들은 ‘거수기’로 전락한 지 오래다.

만약 조현아 전 부사장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대한항공에 레드팀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리스크 매니지먼트(위기관리) 차원에서 국내 기업들이 레드팀 운영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김상수 산업부 차장 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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