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다니는 박모 차장(45)은 얼마 전부터 같은 팀 후배들이 자신을 데면데면하게 대하는 바람에 회사 생활이 영 불편하다. 지난해 말 있었던 부서 회식이 화근이었다.
고깃집에서 1차를 마치고 나오니 오후 9시. 부장은 불콰해진 얼굴로 “근처 호프집이나 노래방에 가서 한잔 더 하자”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들은 몇몇 젊은 팀원들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졌다. 뒤에서는 “집에 일찍 가야 하는데…”라는 푸념도 들렸다.
모처럼 흥이 난 부장의 기분을 거스를까 걱정이 된 박 차장은 “말단 사원들이 집에 갈 궁리만 해서야 되겠느냐”며 “명령이다. 오늘 2차는 내 밑으로 열외 없다”라고 후배들을 다그쳤다. 결국 모두 2차 장소로 가긴 했지만 그 다음부터 후배들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
박 차장은 “젊은 친구들이 다소 강압적으로 느꼈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불편한 결과를 불러올 줄은 미처 몰랐다”며 “요즘 젊은 직원들은 우리가 말단사원일 때와는 가치관이 확실히 다른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 ‘어느 편에 서야 하나’…슬픈 차장들
차장은 회사의 ‘허리’와 같다. 부장이나 팀장의 지시를 명확하게 후배들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신입사원이나 대리, 과장 등 후배들의 불만이나 건의사항을 부드럽게 상사에게 알리는 일 역시 차장의 역할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차장들은 요즘처럼 회사 생활이 ‘가시방석’인 적이 없다고들 하소연한다. 소통이 어렵다는 게 대표적인 이유다. ‘회사의 성공이 바로 나의 성공’이라는 생각으로 일에 파묻혀 살아온 임원 및 관리자와 ‘직장은 나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이 강한 젊은 사원들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직장인들은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해 8월 진행한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직장인의 60.9%가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수직적인 조직문화’를 꼽은 이가 48.1%로 가장 많았다. 서로의 의견을 잘 이야기하지 않아서(27.0%), 팀이나 사내 이슈가 잘 공유되지 않아서(14.1%) 등을 꼽은 응답자도 적지 않았다.
식품회사에 다니는 김모 차장(41)도 얼마 전에 직속 부장에게 핀잔을 들었다. 후배들이 “회의 시간이 너무 길어 비효율적”이라고 여러 차례 하소연해 이를 부장에게 건의한 게 원인이었다.
당시 부장은 “너는 연예인도 아닌데 지금 인기 관리 하고 있느냐”며 “무조건 후배들 얘기만 들어주려고만 하지 말고 기강을 잡을 생각도 하라”고 꾸중했다.
그렇다고 마냥 부장이나 임원의 기분만 맞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후배들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윤모 차장(40)은 얼마 전 후배들에게 드라마 ‘미생’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가 민망한 경험을 했다. 그는 “‘오상식 차장을 보면 나와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더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며 “후배들은 나를 마복렬 부장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라며 아쉬워했다. 사내 정치는 잘 못하지만 일처리만큼은 똑 부러지는 오 차장보다는 가부장적인 데다 출세에 집중하는 마 부장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부하들을 보며 서운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 “직장의 허리? No. 우리는 끼인 세대”
과거에는 차장 등 중간 관리자가 갖춰야 할 요건으로 직원 간의 화합이나 상호 교류, 또는 윗분들의 생각을 잘 파악하는 정무 감각을 꼽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스마트’한 업무 처리 능력을 중요하게 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풍(社風)이 비교적 보수적인 금융권의 경우 이런 문화 충돌이 더 많이 일어나는 편이다. 한 금융회사에 다니는 임모 차장(45)은 “차장, 부장들의 일처리가 서투르거나 업무를 후배들한테 자주 떠넘기는 모습이 보일 때면 바로 ‘무능력한데 월급만 축 낸다’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며 혀를 찼다.
그러나 직장 내 끼인 세대인 차장들이 이러한 불편한 상황을 벗어나는 노하우를 찾기란 쉽지 않기만 하다. 한 식품업체에 다니는 40대 차장은 요즘 유행인 걸그룹 EXID의 노래 ‘위아래’ 가사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고 했다. “원래는 연인 사이의 감정을 표현한 노래인데 위와 아래 중 어디에 무게중심을 둬야 할지 ‘줄다리기’하는 우리 같은 직장인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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