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직장인 A 씨는 연말정산에 필요한 서류 한 장 때문에 ‘속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A 씨는 가족관계증명서를 집에서 발급받기 위해 일요일 오후 대법원의 ‘전자가족관계등록시스템’(efamily.scourt.go.kr)에 접속했다.
평소 쓰던 웹브라우저인 크롬(Chrome)을 이용한 A 씨. 접속하자 마자 ‘보안상의 이유로 크롬은 지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와 마주쳤다. 인터넷 익스플로러(IE)로 다시 접속하니 이번에는 ‘먼저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하라’는 문구가 떴다. 지시를 따르고 보니 ‘일요일과 공휴일은 서비스하지 않는다’는 안내가 나왔다. 이 사이트에서는 평일에도 오후 10시 이후에는 서류 발급이 불가능하다.
다음 날 다시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난관이 기다렸다. 또다시 ‘무엇인가’를 설치하고는 본인 인증을 위해 공인인증서 암호를 넣고 출력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웬일인지 여기서 출력 기능이 멈춰 버렸다.
해결책을 찾으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최신 버전의 브라우저를 삭제하라’ ‘특정 폴더를 지우라’ 등 다소 복잡한 조언이 올라와 있다. 난감해진 A 씨,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과정에서 A 씨가 ‘기술적으로’ 무슨 잘못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논의의 핵심은 정부 및 공공기관의 인터넷 서비스가 과연 ‘고객 관점’에서 이뤄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부의 고객은 국민이다. 더구나 납세 의무 때문에 사이트를 이용한다면 이 점은 더 분명하다. 특정 웹브라우저 사용이나 공휴일 서류 발급을 제한하는 것은 고객을 외면한 처사다. IE 이외의 브라우저를 이용하는 데에 이처럼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은 국세청의 ‘연말정산간소화서비스’(www.yesone.go.kr)나 행정자치부의 ‘민원24’(www.minwon.go.kr)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분명히 따져 봐야 할 것이 있다. 정부가 ‘본인 확인에 필요하다’며 사용하고 있는 ‘공인인증서’다. 박근혜 대통령이 “없애라”고 지시한 ‘액티브X’ 역시 공인인증서 때문에 필요한 프로그램이다.
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공기관 사이트를 이용하려면 액티브X와 공인인증서를 사용해야 한다. 대다수 은행과 신용카드사의 금융 거래에도 공인인증서 사용은 필수다.
정부와 금융기관은 공인인증서 사용의 주요한 이유로 보안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철저한 ‘공급자 위주’의 시각이다. 기술적 대안을 찾아내는 대신 사용자에게 불편을 강요해 온 셈이다.
요즘은 해외 쇼핑몰 직구 등으로 ‘원클릭’ 결제의 편리함을 경험해 본 국민이 많다. 기자 역시 미국 연수 시절 은행이나 쇼핑몰에 미리 넣어둔 신용카드 정보로 온라인 쇼핑과 뱅킹을 손쉽게 처리해 본 경험이 있다. 공인인증서는 필요 없었다.
가마솥에 물을 데워 목욕하던 시대라면 수도꼭지에서 온수가 펑펑 쏟아지는 현대식 욕실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편이 일상화되면 불편을 모른다. 그러나 한 번 편리함을 경험하면 다시 불편함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다. 국민들은 온수 보일러 시대에 살고 있는데 공공기관, 금융기관만 ‘가마솥 목욕’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액티브X나 공인인증서의 규제를 풀자는 것은 단순히 해외에 코트 몇 벌 팔자는 취지가 아니다. 높아진 국민의 눈높이에 서비스 수준을 맞추자는 뜻이다.
보안이 우려된다면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고 보완하면 된다. 옛 기술을 고수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핀테크’ 발전을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고객 관점의 혁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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