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억 벤처 키운 숨은 힘은 ‘인문학’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16일 03시 00분


[벤처기업 3만개 시대]<上>김영달 IDIS대표의 조언

벤처의 꿈 키운 물건은? 12일 만난 권돌 ㈜ISL코리아 대표, 김영달 ㈜IDIS 대표, 김찬호 SNS에너지 
대표(왼쪽부터)가 환하게 웃고 있다. 이들은 자신에게 영감을 주고 현재의 벤처기업 대표로 성장하도록 만든 ‘가장 소중한 물건’으로
 각각 카메라, 비디오테이프, 여권을 꼽았다. 인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벤처의 꿈 키운 물건은? 12일 만난 권돌 ㈜ISL코리아 대표, 김영달 ㈜IDIS 대표, 김찬호 SNS에너지 대표(왼쪽부터)가 환하게 웃고 있다. 이들은 자신에게 영감을 주고 현재의 벤처기업 대표로 성장하도록 만든 ‘가장 소중한 물건’으로 각각 카메라, 비디오테이프, 여권을 꼽았다. 인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 벤처 전성시대다. 1998년 2042개였던 한국 벤처기업은 지난달 3만 개를 돌파했다. 지난해 신규 벤처 투자규모도 1조6393억 원으로 2013년보다 18.4% 증가했다. 이런 추세라면 역대 최대 투자규모(2000년 2조211억 원)도 곧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가 상당 부분 벤처와 맥이 닿아 있다는 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벤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3만 벤처시대를 맞아 한국경제의 신(新)성장동력인 벤처의 역할과 가능성에 대해 3회 시리즈로 살펴본다. 》

벤처기업 수가 3만 개를 넘어섰다. 전국에 있는 초등학교가 6184곳, 편의점이 2만4859곳이다. 이쯤 되면 주변에 “벤처 한다”는 사람 한두 명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모두가 성공한 벤처인(人)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3만 벤처기업 가운데 454개(약 1.5%)가 큰 성공을 거뒀다. 연매출 1000억 원을 돌파한 이른바 ‘1000억 벤처’가 된 것이다.

1000억 벤처는 벤처인들 사이에서 꿈같은 얘기다. 최근 초고속 성장을 이뤄낸 권돌 ㈜아이에스엘(ISL)코리아 대표(42)와 김찬호 에스엔에스(SNS)에너지 대표(29)는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하지만 둘은 1000억 벤처 주인공인 김영달 ㈜아이디스(IDIS) 대표(47)와 함께 만나자고 제안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선뜻 뛰어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꿈을 좇는 두 사람은 이미 꿈을 이뤄낸 우상을 만나자 2시간 넘게 질문을 쏟아냈다.

○ 공학도들의 만남

12일 인천 송도에 있는 자신의 자회사에서 ‘스타트업(신생벤처기업)’ 후배를 만난 김영달 대표는 “우리 셋 다 ‘공돌이’”라며 반겼다. 김 대표는 KAIST에서 전산학을, 권 대표는 미국 오하이오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김찬호 대표는 광운대 전자물리학과를 다니다 그만뒀다. 세 사람 모두 공학도로 자신만의 기술을 가지고 창업한 기술개발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IDIS는 디지털영상저장장치(DVR)를 만드는 영상보안 전문기업이다. 창업 13년 만인 2010년 매출 1000억 원을 돌파했다. 이 분야에서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 영국의 델리케이티드마이크로(DM) 등과 함께 세계 3대 회사로 꼽히고 있다. ISL코리아는 일반 영상을 터치스크린이 가능한 영상으로 바꿔주는 ‘빅노트’란 제품을 만들고 있으며, SNS에너지는 폐수에 담긴 열에너지를 재활용하는 설비를 생산하는 회사다.

셋의 대화가 자칫 전문기술 분야로 흘러가지는 않을까 우려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질문과 답변의 큰 주제는 의외로 사람, 관계, 열정 등 철학·인문학적 내용이었다.

○ 벤처의 고민도 결국 인문학적 내용


“회사를 처음 만들 때의 열정이 어느 순간 식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어떻게 극복하셨나요.”(김찬호 대표)

“대표인 제가 회사에서 겉도는 느낌입니다. 제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뚜렷한 이유도 사라진 것 같습니다.”(권돌 대표)

피말리는 경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벤처 대표들의 질문치고는 너무 한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김영달 대표는 마치 하산(下山)을 앞둔 수제자에게 마지막 비법을 전하려는 듯한 표정이었다. 김 대표는 “한때 잘나갔던 벤처들이 단명한 것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못 찾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매출액 뒷자리에 ‘0’이 하나씩 더 붙는 퀀텀점프(대도약) 시기에는 최고경영자(CEO)가 가장 먼저 회사의 비전과 가치를 공고히 하는 작업을 해야 하고 그 결과를 조직원들과 반드시 공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카메라-비디오테이프-여권 보며 초심 떠올려” ▼

스타트업들이 이런 과정을 소홀히 한 채 돈벌이에만 몰두하다가 결국 공중분해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거창하지 않더라도 회사를 운영하는 자신만의 이유와 목표를 설정하고 반복적으로 스스로에게 ‘세뇌’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소중한 물건으로 초심을 떠올리다

큰형인 김 대표는 벤처를 시작했을 때의 초심과 열정을 떠올릴 수 있는 물건을 곁에 두는 것도 스스로를 다잡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구식 비디오테이프(VHS)를 꺼내 들었다. 1997년 당시 KAIST 박사과정이었던 김 대표는 미국 실리콘밸리를 다녀온 후 창업에 대한 꿈을 키웠다. 창업 아이템을 물색하던 중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학교 경비실 한쪽 구석에 박스째 쌓여 있던 비디오 녹화테이프였다. 이 비디오테이프를 대신할 디지털영상저장장치를 만든 것이 오늘의 김 대표를 만들었다.

김찬호 대표는 여권을 꺼냈다. 그의 여권에는 40여 개 나라의 출입국 도장이 빼곡하게 찍혀 있었다. 김 대표는 “좋은 기술이 있었지만, 고졸 학력의 20대 초반 대표에게 선뜻 일을 맡기는 한국 기업은 없었다”면서 “이 여권을 들고 무작정 해외로 나가 판로를 뚫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의 SNS에너지는 지금도 제품의 95%를 외국에 수출하고 있다.

카메라는 권돌 대표가 내놓은 소중한 물건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던 권 대표는 어릴 적부터 카메라에 꽂혔다. 지금도 150여 대나 가지고 있을 정도로 ‘카메라광’이다. 그는 “카메라를 다룰 때가 가장 재밌고 행복했다”면서 “그 재미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카메라와 영상에 관한 창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는 재미에 더해 올해 200억 원 매출을 내다보게 됐다.

김기용 기자 kky@donga.com
#벤처기업#인문학#ID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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