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매출 3000억 원대의 중견 제약기업 A사는 최근 변호사를 특별 채용했다. 채용 주체는 법무팀이 아닌 특허팀이었다. 이는 제약업계에선 이례적인 일이다. A사 특허팀의 변호사 채용은 제네릭(복제약) 허가체계가 전면적으로 바뀌는 데 따른 조치다. 회사 관계자는 “제네릭 특허에 대한 전략을 어떻게 세우는지에 따라 회사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라며 “경쟁사들도 제네릭 시장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등 ‘특허 정보전’에 돌입했다”고 말했다.
제약업계에서 ‘제네릭 특허전쟁’의 전운이 짙어지고 있다. 이달 15일부터 제네릭 허가체제가 전면 개편되기 때문이다. 변화의 골자는 오리지널 약을 만든 제약사의 특허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오리지널 제약사와의 특허소송에서 승리한 제네릭 제약사에 일정 기간 동안 판매 독점권을 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제네릭 매출 비중이 높은 국내 제약업계가 대책 마련에 분주해졌다.
● “특허침해” 이의 없으면 판매 금지
15일부터 시행되는 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허가-특허 연계제도’에 있다. 후발 제약사가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제네릭 생산허가를 받을 때 오리지널 제약사가 특허가 침해받았다고 이의를 제기하면 자동으로 9개월 동안 제네릭 시판이 금지되는 것이다.
그동안은 어떤 제약사나 오리지널 의약품 특허와 무관하게 제네릭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만약 특허침해 논란이 생기면 당사자들이 소송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새 제도가 시행되면 제네릭 업체는 복제약 허가신청 사실을 의무적으로 오리지널 제약사에 알려야 한다. 그리고 오리지널 제약사가 특허를 침해받았다고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이의를 제기하면 제네릭 판매가 금지된다.
이것은 원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합의사항 중 하나다. 협상 당시에도 오리지널 제약사의 특허권을 과도하게 보호한다는 논란이 일어 한미 양국은 협정 발효(2012년 3월 15일) 3년 후부터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정부는 허가-특허 연계제도의 단점을 해소하기 위해 보완책을 마련했다. 제네릭 제약사가 오리지널 제약사와의 특허소송에서 이길 경우 9개월 간 제네릭 판매독점권을 주는 ‘우선 판매 품목 허가제도’다. 결과적으로 특허 소송에서 이긴 제네릭은 9개월 간 오리지널 약과 일대일로 경쟁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황유식 한미약품 상무는 “소수의 제약사가 특허를 무력화시키면 다수의 제약사가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제네릭을 출시해온 게 업계 관행이었다”며 “앞으로는 이런 ‘무임승차’가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군소업체들은 “대형회사들의 입장만을 생각한 제도”라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 “제네릭의 약값인하 효과 줄어들 수도”
새 제도의 시행에 따라 국내 제약업계에서는 연간 5조 원 안팎으로 추산되는 제네릭 시장에 큰 지각변동이 일어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제네릭 의존도가 높은 국내 제약업계 특성상 제대로 된 특허전략을 세우지 못한 회사는 최악의 경우 시장에서 퇴출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녹십자와 보령제약 등 제약사들은 특허 관련 인력을 10~20% 가량 보강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특허 소송도 봇물을 이룰 전망이다. 제네릭에 대한 특허권을 남들보다 빨리 무력화시키면 9개월 동안의 ‘황금기’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없던 ‘합종연횡’ 가능성도 있다. 인텔리콘법률사무소의 임영익 변호사는 “특허 소송에 참여한 업체는 모두 우선 판매품목 허가를 가져갈 수 있다”며 “수십 개 업체가 공동으로 뭉쳐서 공동 특허 소송 진행할 가능성도 크다”고 예상했다.
연구개발 역량이 막강한 글로벌 제네릭 업체들의 국내 진출도 가속화될 전망이다. 세계 1위 제네릭업체인 테바는 이미 2012년 한독과 손잡고 ‘한국테바’를 설립했으며, 미국 제네릭 업체인 알보젠도 근화제약과 드림파마 등을 인수하며 치를 키웠다.
한편 우선 특허권자가 이의를 제기하면 특허 소송이 끝날 때까지 복제약 출시가 지연된다는 점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07년 보건복지부는 복제약의 시장 진입 지연 기간을 9개월로 가정할 경우, 제네릭 업체들의 매출 손실액은 연간 370억~790억 원이 될 것으로 추산했다.
제약협회 관계자는 “다국적 제약사들이 특허 소송을 이용해 복제약 출시를 최대한 늦추려 할 수 있다”며 “그럴 경우 오리지널 제품의 국내시장 잠식 기간이 더 늘어난다”고 말했다. 이주영 녹색소비자연대 본부장도 “시장에 오리지널 약과 소수의 제네릭만 유통되면 약값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돼 가격 인하라는 제네릭의 순기능이 줄어들 것”이라며 “다국적 제약사들이 특허권을 과도하게 방어해 고의적으로 제네릭 출시를 지연시킬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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