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가 부진할 때 특히, 심각한 불황일 때는 공급은 넘쳐나는데 수요는 거의 없어 보인다. 일하려는 사람은 있는데 일자리가 없고, 공장은 충분한데 주문이 없으며, 상점은 열려 있지만 손님이 별로 없다.
-‘불황의 경제학’(폴크루그먼·세종서적·2015년)
1970년대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는 ‘그레이트 캐피톨힐 베이비시팅 조합’이라는 이름의 육아 협동조합이 있었다. 150여명의 젊은 부부 조합원들이 서로의 아이를 돌봐주는 일종의 아이돌봄 품앗이다. 쿠폰 한 장으로 한 시간 동안 아이를 맡길 수 있고, 반대로 남의 아이를 한 시간 봐주면 쿠폰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외출에 대비해 충분한 쿠폰을 확보하려는 부부들이 늘어났다. 모아놓은 쿠폰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이들은 다른 부부의 아이를 돌보고 싶어 안달이었고, 외출을 꺼렸다. 베이비시팅을 원하는 이들이 줄어들자, 쿠폰을 모을 기회 역시 줄어들었다. 베이비시팅 조합이 불경기에 닥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가 처한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물론 실제 경제는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쿠폰(돈)을 모으는 일에만 집중해 베이비시팅(재화) 수요가 현저히 감소했다는 점에서 세계 경제에 닥친 불황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캐피톨힐 협동조합은 쿠폰의 공급을 늘려서 문제를 해결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공급이 아닌 수요의 측면으로 불황의 원인을 설명한다. 공급이 넘쳐나는 데도 세계가 경기 후퇴의 늪에 빠진 것은 잠재적 수요가 시장으로 나갈 길을 찾지 못해 발생한 ‘막힘 현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해결책은 충분한 수요를 경제에 제공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금리를 낮춰 돈을 풀고 도로, 다리 건설 등 인프라 구축 사업으로 지출을 늘리는 등의 케인스식 경기부양 정책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실질 금리가 마이너스인 시대에 들어간 유럽,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도 실질 제로 금리 시대로 접어들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인 1.75%로 낮추면서 시장에 풀리는 돈이 늘고 있다. 이제는 이 돈이 생산적인 분야에 투자돼 경기활성화로 이어지도록 하는데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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