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현대자동차그룹의 고속성장을 주도했던 김동진 전 현대차 부회장이 현직에 있을 때 자주 하던 말이 있다. 현대차가 미국 시장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으려면 픽업트럭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픽업트럭은 차량 뒷부분에 지붕 없는 짐칸이 달린 소형 트럭을 말한다. 웬만한 짐은 다 싣고 움직일 수 있는 실용성 때문에 대다수 미국 가정에서 보유하고 있다.
김 전 부회장은 “픽업트럭을 팔아야 진짜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고 볼 수 있다”며 픽업트럭 생산이 자신의 숙원사업임을 강조했다. 그는 2004년 시카고 모터쇼에 픽업트럭 콘셉트카를 선보이는 등 양산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생산 공장도 기아자동차 미국 조지아 주 공장으로 잠정 결정했다.
하지만 김 전 부회장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2008년 5월 미국 경기 침체와 유가 급등이 겹치면서 픽업트럭 생산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 시장에서 승용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싸고 기름을 많이 먹는 픽업트럭 판매가 급격히 줄어든 상황에서 모험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해 9월 김 전 부회장이 현대차를 떠나면서 픽업트럭 생산 프로젝트는 사실상 중단됐다.
최근 들어 김 전 부회장의 꿈이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 경기 회복과 함께 유가 하락으로 픽업트럭 수요가 늘어나자 현대차가 캐비닛 속에 있던 ‘픽업트럭 파일’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현대차가 최근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북미국제오토쇼(디트로이트 모터쇼)에 공개한 픽업트럭 콘셉트카 ‘HCD-15 산타크루즈’가 결과물이다.
현대차는 공식적으로는 “단순히 콘셉트카를 만든 것뿐”이라며 “픽업트럭 양산 여부는 결정된 것이 없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외 자동차업계에서는 현대차가 픽업트럭을 생산하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분석이 많다. 미국 시장에서 승용차와 미니밴,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만으로 시장점유율을 확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데다 픽업트럭이 승용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지난달 미국을 방문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올해는 유로화와 엔화 약세, 픽업트럭 시장 확대로 어려움이 예상된다”며 “이럴 때일수록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분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동안 현대차는 위기가 올 때 예상을 뒤엎는 ‘카드’를 던져 성공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캐나다 공장이 실패하자 인도로 넘어가 재기한 것이나 품질 및 디자인 경영으로 ‘싸구려 차’ 이미지를 불식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현재 현대차는 수입차의 공세로 국내 시장점유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데다 환율 문제로 해외시장 수익성도 악화되는 등 대내외적 악재에 직면해 있다”며 “픽업트럭이 성공하면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현대차가 미국 픽업트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가장 미국적인 차인 만큼 미국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충성도가 높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시장 창출과 브랜드 이미지 제고를 감안하면 현대차가 머뭇거릴 이유는 없다는 게 자동차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미국 시장에서 진정한 자동차업체로 대접받겠다는 김 전 부회장의 꿈이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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